베이징(北京)이 중국 왕조의 수도지역으로 등장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현재의 베이징과 직접 연결된 것은 원의 대도(大都)부터이다. 대도는 쿠빌라이에 의해 건설되었다.그가 1271년 '대몽골국'이라는 국명 대신 유교경전에 기초한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국호인 '대원(大元)'을 채용한 것은 초원과 농경지대를 포괄하는 다민족국가의 통일적 지배자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한 것인 동시에 중국 본토를 기반으로 한 왕조를 지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국호를 채용한 다음해(1272) 신축 중인 도성을 '대도'라 명명하였다. 대도의 건설에 대해 일부 몽골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지만, 쿠빌라이는 의연히 '한법(漢法ㆍ중국의 법)'을 채용하고 '한지(漢地ㆍ화북농업지대)'에 수도를 두는 길을 택했다.
쿠빌라이는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기에는 한지에 너무 깊이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는 대도 건설과 병행해서 대남송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휘하에는 한지에서 징용한 한인이 20만명이나 되었으며, 당시 그의 군대 통제 하에 있었던 한지의 인구도 총 140만~150만호로 추산되었다.
금나라 중도(中都)였던 연경(燕京)은 여러 차례 전쟁으로 황폐화해 있었다. 대도 건설의 령이 반포된 것이 1266년이고 완공된 것이 1293년의 일이니 28년간의 대역사였다. 중도 동북쪽에 완전한 계획도시로 건설된 대도는 완벽한 중화식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제까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주례(周禮ㆍ소주시대의 제도를 기술한 유가 경전중 하나로 이상적인 정치 체제의 모형을 그리고 있다)가 규정한 도성 구조의 이상형이 이방인인 쿠빌라이에 의해 지상에 실현된 것이다.
바둑판같은 도시구조를 가진 도성의 중앙에 있는 2개의 교차점 위에는 고루(鼓樓)와 종루(鐘樓)가 세워졌다.
황제가 정한 시간에 따라 울리는 종과 북소리에 의해 인민의 생활은 통제되었다.
쿠빌라이는 대도를 자신이 직접 '살기' 위한 도시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보기 위한' 도시였다.
쿠빌라이와 그 궁정 군단은 특별한 의식이 있다거나 상당히 춥다거나 하지 않으면 거의 대도성 안에 입성하려 하지 않았다.
성내 생활보다도 교외의 야영지에 세워진 장대한 천막궁전에서 지내는 것을 즐겼다. 도성의 주인인 몽골인들은 항상 이동하고 있었는데 비해, 움직이지 않는 대도는 지배와 통치에 필요한 사람과 물건을 수용하는 큰 '그릇'인 동시에 '창고'였다.
원나라에는 한 개의 수도가 더 있었다. 상도(上都)가 그것이다. 왜 그들에게 두 개의 수도가 필요하였던가? 우리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답사 길에 나섰다.
7월의 베이징, 찌는 듯한 더위로 사람도, 가로수도 축 쳐져 있었다. 간혹 소맷깃을 스치는 바람은 어김없이 북쪽 옌산(燕山)산맥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답사반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전세버스를 타고 산맥을 넘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뚫려진 간선도로는 여러 개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원 황제의 피서여행지인 옌산산맥 너머 상도(현재의 네이멍구 둬룬 서쪽)로 향해 뚫려진 길들이다.
상도도 몽골제국의 제4대 군주인 뭉케(재위 1251~59)로부터 막남(고비사막의 남쪽)의 초원과 한지의 통제를 위임받은 쿠빌라이에 의해 건설되었다.
쿠빌라이는 뭉케의 명령을 받고 본거지를 한지에 가까운 금련천(金蓮川)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고 개평(開平)이라 이름 붙였다. 거기에 궁전을 지었다.
형인 뭉케가 죽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에 치열한 계승전쟁이 벌어졌다. 막남과 한지에 근거를 둔 쿠빌라이는 1260년 상두에서 제위에 올랐다.
막북에 근거지를 둔 아릭 부케는 한지의 풍부한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연경은 이 전쟁 중에 다량의 군대, 군용식량과 병참물자를 집적하는 군사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연경은 전략적 중요성과 수도로서의 중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특히 초원과 농경지역을 동시에 통치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당초 부도(副都)였던 연경은 대도로 그 이름을 바꾼 후, 정치중심의 남향에 따라 상도를 부도로 밀어내고 주도(主都)로서의 위치를 굳혀갔다.
상도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여전히 잃지 않았다. 그곳에 대도에 버금가는 정부 관서가 설치, 유지되었고 일년의 반은 황제가 머물렀기 때문이다.
중국 왕조 가운데 복수의 수도를 둔 왕조는 원 이외에도 많지만, 그것을 둔 목적이나 운용방법은 크게 달랐다. 원의 양경제(兩京制)는 명나라의 '베이징 _ 난징'식의 이중수도(dual capital)가 아니었다.
즉 '점'으로서 두 개의 도읍이 아니라, 긴지름이 350㎞나 되는 타원형의 영역 전체가 의미를 갖는 '면'으로서의 '수도권'이었다. 이 면 안에다 궁전도시, 공예도시, 창고도시, 군사도시 등 각종의 기능도시를 점재시켰다.
황제의 지방 행차를 '순행'이라 하지만 이런 양경 순행제는 동영지, 하영지로 계절 이동하는 유목민족 생활양식의 연장이다.
원 황제의 양경 순행제도는 96년간 지속되었는데, 대개 3월 대도에 더위가 오기 전에 북으로, 9월 상도에 추위가 오기 전에 남으로 가는(未暑而至 先寒而南) 형식이다.
원 황제가 상도로 갈 때는 제일 단거리인 동쪽의 연로(輦路)를 택하지만, 돌아올 때는 현재의 장자커우(張家口)를 거치는 서쪽 길을 택했다.
동로로 갔다 서로로 돌아오는 방식(東出西還)이다. 감찰어사나 군대의 전용로인 구베이커우(古北口) 경유의 동로를 제외한 세 길은 쥐융관(居庸關)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쥐융관에는 유목민출신의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윈타이(雲臺)라 불리우는 관문 위에 과가탑(過街塔)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왕래하는 각종 인민들을 종교적으로 세뇌, 마취시키기 위해 그 석벽에 사천왕상(四天王像) 및 산스크리트(梵)자 등 6종의 문자로 된 다라니주 등을 새겼다.
상도와 대도의 2대 거점을 왕래하는데 길에서 소비되는 시간만 각 20~25일이나 됐다. 매년 2개월 정도를 노상에 머무는 셈이다.
황제의 순행에는 후비 태자 종실 등과 관원, 황제의 호위병 등 10여만명이 따랐다. 이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수도였다. 원제국은 이와 같이 군사와 경제 기능 등을 동시에 겸비한 '다기능의 수도권'을 중원지배의 중핵으로 삼은 것이다.
새외(塞外ㆍ북방의 유목민이 사는 지역)에서 들어 온 이방인이 큰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수도권이 '근거지'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 황제의 양경 순행은 단순한 피서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권에 산재한 이들 기능도시에 대한 기능의 점검이기도 했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상도 유적지
카라코룸과 카라발가순 등 몽골 초원의 유적지들이 대개 그렇듯 지금 상도유적지에도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내외 이중의 토성, 황제가 머물던 대안각(大安閣)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 몇 기를 빼고는 온통 풀밭이다. 조금 높은 곳에서 토성 전체를 내려다보며 유적지의 규모를 짐작하는 것 말고는 상도를 엿볼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상도유적지는 토성과 대안각 주춧돌 정도를 빼고는 대부분 풀밭으로 변해있다.
사각형 모양의 상도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그리고 외원(外苑) 등 3개 구역으로 구성돼 있었다. 대안각이 있던 내성은 동서 557㎙, 남북 641㎙이고 상도유적지 전체로는 한 면이 2,200㎙ 안팎이나 돼 10만명 정도가 살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38년 이뤄진 조사 결과 내성에서는 대안각터와 관청터 등이, 외성에서는 두개의 사원 흔적이 각각 발견됐다. 또 당시 기와와 벽돌, 건축석재, 석인상(石人像), 도자기 등도 찾을 수 있었다. 상도는 1358년 홍건적의 난으로 불이 나면서 황폐해졌다. 최근까지도 유목민들이 토성 안에서 살다 1999년에 모두 나갔다고 한다.
상도유적지 앞에는 이 지역서 나온 유물을 전시한 정란기(正藍旗)문물소라는 아주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돌궐부터 원대까지의 석인상 아홉기가 전시돼있다, 마당에는 지름이 5㎙ 정도 되는 대형 솥도 있는데 원대에 연회를 열 때 사용한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근처 지역에서 나온 석기, 도자기, 당ㆍ송대의 동전 등이 있다.
산단(珊丹ㆍ39) 정란기문물소 소장은 상도가 한국인에게는 낯선 곳이지만 미국과 이탈리아, 일본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5,000~6,000명이나 찾는다고 말했다.
중국은 상도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고 95년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줄 것을 신청했다. 역사에세이팀이 방문한 지난해 7월에는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해 흙길을 내고 있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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