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권력을 추구할 때, 정치의 세계는 교활하고 비정해 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여야가 정권 재창출과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여권 의 당정 개편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전략적 인사 포진의 냄새가 난다.
야당에선 창(昌ㆍ이회창 총재)이 뒤로 서서히 빠지고 있다. 이것도 결전의 태세다. 결전을 앞둔 장수가 힘을 비축하기 위해 후방 지휘선으로 물러나는 것과 같다.
다가 올 대선에서는 또 어떤 조합으로 '적과 친구'가 만들어 질지 궁금하다. YS와 JP, 두 金의 행보가 우선 관심사로 떠 오른다.
두 金은 이미 킹 메이커를 자임했다. DJ와 昌이 대칭의 중심인 지금으로서는 JP는 DJ의, YS는 일견 昌의 친구로 보인다. 그러나 막판까지 이 관계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본인도 섣불리 예단 못한다. 3金을 왜 노회(老獪)한 정치 9단이라고 했겠는가. 만약 YS가 反昌으로, JP가 反DJ로 돌아 선다면 두 사람은 각각 지금과 다른 쪽의 친구가 될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되는 이치다. 지난 대선 때 이인제씨가 그런 경우다.
우스꽝스럽게도, 이런 등식은 전직 대통령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전통(전두환 전 대통령) 노통(노태우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 YS는 적이다. 고로 DJ는 전통 노통의 친구가 된다.
DJ가 부르면 전통 노통은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 가서, 유쾌하게 밥 먹고 얘기하지만 YS는 한사코 안 간다. 정치에서 이런 등식은 부지기수다.
두 金의 킹 메이커 자임에 대해 시중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다. 메이커 자체가 '지는 해'로 별 볼일 없다는 것이다.
4.13 총선 때의 결말을 예로 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다. 순기능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남을 해코지 하는 이른바 역기능적 영향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DJ와 昌은 이걸 두려워 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여야 일각에서 정ㆍ부통령제와 중임제 개헌론이 불거진 뒤 점차 새끼를 쳐 가고 있는데, 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차하면 이로 인해 적과 친구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래선지 야당은 개헌론을 음모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개헌론이 정계개편, 즉 '헤쳐 모여'의 논리적 매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사실 개헌론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건 실사구시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이 원치도 않는다.
나라와 정치가 이 모양 이 꼴 된 것이 헌법 탓은 절대 아니다.정ㆍ부통령제 주창자들은 지역감정 완화와, 대통령에 대한 권력의 효율적 견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건 애당초 씨가 먹히지 않는 주장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을 견제 할 사람은 없도록 되어있다. 미국에서도 부통령은 허수개비다.
중임제도 마찬가지, 함정은 있다. 일부에선 개헌론자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대통령 후보로는 '씨알이 작은 감자'니까, 부통령 후보라도 되려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고.
정치에서 적과 친구의 관계가 수시로 변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뿐이다. 자유롭게 이당 저당 왔다 갔다 하니까, 민주주의가 너무도 발달한 증거라고 자위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변화무쌍한 인간관계는 정치의 황폐화를 부채질 할 수도 있다. 이런 정치에서 문명의 냄새가 날 리는 없다.
요즈음엔 언론에서도 적과 친구의 구별이 생기려고 한다. 언론이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소수파가 정권을 잡고, 옛날 옛적의 민주화 투쟁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언론의 덕인데도 말이다. 참으로 희한한 세상이 됐다.
이종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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