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사법 파동은 장기집권을 기도하던 박정희정권이 사법부 길들이기를 자행한 데서 비롯됐다. 그때는 이른바 기관원이 아무나 잡아가던 시절이었다.7월 28일 판사실에 출근하니 지난 밤에 입회 서기가 잡혀갔다는 것이다. 혐의는 지난달 형사사건으로 제주 출장 심리시 여비를 변호사가 부담하였다는 것.
당시는 형사여비 규정이 명목뿐이어서 당연히 출장을 신청을 한 당사자가 여비를 부담하던 시대였다.
판사들이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진상을 알아보느라 매우 소란해지고 있었다. 입회서기 체포는 시국사건에 무죄판결을 잇따라 내린 이범렬재판장을 겨냥한 것으로, 이미 고위층의 재가를 얻었다는 것이다. 배석판사이던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후에 험악한 인상의 수사관 두 사람이 판사실에 들어와서 내게 동행을 요구했다. 동행을 지시한 사람이 마침 고시 동기인 공안부 검사라고 해서 전화로 부당한 소환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고 법원장실로 갔다.
내 소식이 검사장에게 보고되고 법원장과 검사장이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나는 어떤 출석 요구에도 응할 수 없다고 대응했고 법원장은 나보고 분위기가 험악하니 오늘 밤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이범렬 부장 판사는 그날 밤 하남호텔에서 검찰 신문에 응하기로 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하남호텔은 당시 공안기관이 유명 인사를 취조하던 곳으로 유명한데 그 뒤 문을 닫았다.
의리상 난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호텔 앞 다방이 문을 닫은 다음에도 암담한 심정으로 호텔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무더운 여름 밤을 잠 못 이루고 지새웠고 아침에 출근하니 새벽에 우리 둘의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것이다. 그 날 영문을 모르는 신혼의 처는 내가 구속된 것으로 알고 하루종일 울었단다.
뒤 이어 사법부 탄압에 대한 국민의 거센 항의에 박대통령이 전면백지화를 지시했지만 무덥고 긴 여름 한달 동안 판사들의 사법권 수호의 몸부림, 사법부를 성원한 국민과 언론, 그것은 한결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염원이었다.
그 후 모든 희망은 유신의 암흑시대로 묻혔지만 난 그때 성원해준 모든 사람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
그리고 88년 민주회복의 여명기에 고법 형사재판장으로 강신옥 변호사 법정모욕사건을 재판하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변론권 보장에 대한 장문의 판결문을 써서 마음속 깊이 묻어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피력했다.
최공웅·법무법인 우방 고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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