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에는 '사전 심의' 라는 제도가 있다. 방송위원회의 사후 심의와 달리 방송 전에 프로그램의 선정성이나 인권침해 등을 거르기 위한 장치이다.방송사는 걸핏하면 자율성을 강조하며 이를 들먹인다. 그러나 사전 심의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다급한 제작일정, 형식적인 심의로 프로그램은 선정성을 더해가고, 공정성을 잃기 예사이다.
그 단적인 예가 '사전심의'조항 위반으로 국내 방송사상 처음으로 과태료를 물게 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다.
화면은 물론 최소한의 사전심의 단계인 대본심의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한 제작일정에 쫓겨 그럴 시간이 없었다.
MBC 홍보심의국 관계자는 "규정상 3일전 프로그램 대본을 제출하고, 심의팀에서 이를 검토하도록 되어 있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작가가 촬영현장에서 허겁지겁 대본을 쓰는 경우도 있어 심의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사전심의 대상 프로그램 가운데 절반 이상이 대본을 안 가져온다"고 밝혀 '일요일.'의 경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증명했다.
특히 출연진이 많고 구성이 복잡한 주말 오락프로그램의 경우 제작진조차 최종 편집과정에서야 프로그램 전체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의 결과를 제작팀에서 수용하지 않아 문제가 될 때도 많다. 방송위원회로부터 출연자가 고무장갑을 뒤집어 쓰는 장면을 지적받은 KBS '자유선언 오늘은 토요일'이 그 경우다.
방송사 자체적으로 '프로그램 폐지'까지 결정한 SBS'쇼 무한탈출'도 심의팀은 "원고는 물론, 제작현장까지 참관하고 문제사항을 지적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고 했다.
심의팀은 "우리의 지적은 권고사항일 뿐 강제는 아니다" "솔직히 제작진의 의욕을 꺾기는 힘들다"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제작ㆍ편집 등 결국 최종 책임자는 PD인데 사전 심의 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을 손대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 따라서 공영방송으로서 기본적인 양식조차 결핍된 경우도 있다.
제작진을 '심의불감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시청률이다. 지난해 8월 '선정성 파동'이후 옐로카드제(SBS), 삼진아웃제(KBS) 등 심의팀의 지적을 수용하지 않으면 제작진에 인사나 급여상의 불이익을 주는 제도가 생겼지만 제대로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다.
"차 떼고 포 떼고 하면 시청률은 뭘로 확보하느냐"는 제작진의 항변에 달리 반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날로 거칠어지는 오락프로그램, 이를 걸러주는 사전심의 제도의 무용지물화에는 결국 '시청률 지상주의'가 숨어있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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