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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남태평戰史 冊펴낸 이건산업 상무 권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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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남태평戰史 冊펴낸 이건산업 상무 권주혁

입력
2001.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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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혁(權主赫ㆍ48)씨를 만난 건 그가 해낸 일이 부러워서 였다. 그는 원목수입업체인 이건산업㈜의 상무이자 이 회사가 남태평양 솔로몬군도에 차린 현지법인의 대표로 있다.그는 올 1월 '헨더슨 비행장(지식산업사)'이라는 책을 냈다. '태평양 전쟁의 갈림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원고지 2,000장 분량으로 600쪽 가까운 두꺼운 책이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80여장 수록되어있으며 약 120권이나 되는 참고문헌과 자료 및 증언수집을 위해 방문했던 미국 일본의 20여개 전쟁박물관 및 기념관 명단, 태평양전쟁 당시의 미국과 일본의 무기체계 비교표와 양국의 피해상황, 작전명령서 같은 귀한 문서도 수록되어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본격적 남태평양 전사(戰史)다.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 책을 교재로 채택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교재채택을 검토하고 있다. 재미있는 전쟁이야기가 다 그렇듯 이 책도 벌써 1쇄가 다 팔려 출판사에서는 2쇄를 준비중이다.

그는 이 책을 1979년에 구상, 90년부터 본격적으로 써오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 두 시간 이상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으며 자료보강을 위해 남태평양 수십개 섬뿐 아니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버마 그리고 프랑스 노르망디의 전적지도 둘러봤다.

전적지를 둘러보면서 양국의 각종 무기도 집이 모자랄 정도로 모아 두었다. 이 무기들로 나중에 개인전쟁사 박물관을 지을 계획이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뤄냈다. 그가 부러운 이유다. 꿈은 있지만 고단한 삶에 쫓겨 그 꿈을 이루기는커녕 종래에는 '나에게도 꿈이 있었던가'고 후회하는 것이 대부분 이 땅의 직장인들의 삶일진대 생업과는 전혀 동떨어진, 어릴 때부터의 꿈에 천착해 그 결과물을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낸 그가 부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수나 언론인이 책을 쓰는 것은 물론 직장인이 자신의 분야에 관한 책을 내는 것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78년 이건산업에 입사, 이듬해 1월 파푸아 뉴기니의 열대산림대학으로 연수를 떠난 그는 그곳의 험준한 스탠리 오웬산맥 곳곳에서 태평양 전쟁의 잔해를 보게 된다. 녹슬어 가는 미군 짚차, 일본군 참호, 추락한 폭격기와 수송기 등‥.

"초등학교 때부터 전사에 관심이 있었다. 군인이 되려다 형편이 맞지 않아 포기했지만 전사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그러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정말 내 손으로 전사를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났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은 미국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우리나라 청년들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이곳에 끌려와 산화했는가.

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와 희생된 분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 때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헨더슨 비행장은 솔로몬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있는 활주로 길이가 1㎞가 채 안 되는 작은 비행장이다.

원래는 일본군이 건설을 시작했으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한 미군이 탈취, 전투에서 가장 용감히 싸운 군인이었던 헨더슨소령의 이름을 붙였다.

"일본군은 이 비행장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6개월간 이 비행장 상공에서 일본군은 전쟁 전 2년간 양성해온 1급 조종사 3,000명중 2,000명을 잃었다.

반면 미군의 조종사 손실은 100명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해군력을 크게 손상한 일본은 헨더슨 비행장 탈환작전에서도 워낙 많은 공군력을 잃어 그 이후 전쟁의 주도권을 서서히 잃게 된다.

헨더슨 비행장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한 분수령이었다. 그래서 이 책 이름을 헨더슨 비행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헨더슨 비행장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과달카날 섬에 있는 현장 근무를 명령 받아 이곳에서 일하면서 우연히 일본이 비행장 건설에 한국인 노무자들을 동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감회가 달랐다. 그분들이 흘렸을 피가 내가 밟고 있는 이땅을 적셨다고 생각하니 정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이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과달카날 비행장 건설에 투입된 일본 해군 공병대 2,500 내지 2,800명 중 300 내지 500명만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한국인 노무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이 비행장을 점령한 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몇 명이 포로가 되고 몇 명이 전투 중에 몰사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미국에 혹시 자료가 있을까 미 해병대 사령부에 편지를 보냈으나 만족할만한 답을 못 받았다." 그는 이 책 후기에 "이 책을 쓴 목적 중의 하나는 일제에 의해 군인이나 군속 혹은 위안부로 끌려와 남태평양의 바다와 땅에 묻힌 우리나라 젊은이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고, 알려주고 싶은 것이었는데 별로 이루지 못했다.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이제는 정말 우리 정부도 이런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60년이 되어가는데 군인과 군속으로 끌려나간 38만명 가운데 15만명이 귀국하지 못했다.

노무자와 위안부를 합하면 훨씬 많은 숫자가 남태평양에서 희생됐을 것이다. 왜 정부가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지 못하는가? "고 절규했다.

삼국지가 그렇듯 '헨더슨 비행장'도 한 번 잡으면 손을 뗄 수가 없다. 풍부한 현장취재와 자료가 뒷받침된 사실적인 서술이 흥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오전 11시 미군기의 공격이 시작된 뒤 쇼호(일본해군 항공모함)는 폭탄 열한발, 어뢰 일곱발을 맞고 35분후 불을 토하면서 꼬리를 높이 들고 산호해의 해저에 수장되었다.

쇼호가 침몰하고 난 지 30분쯤 지나자 쇼호의 함재기가 돌아왔는데, 이들은 마치 어미 새를 찾는 새끼 새처럼 쇼호를 찾았다.

쇼호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첫번째로 미군에게 격침된 일본 항공모함이 되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남태평양 원주민의 카누들만이 산호해의 수많은 섬들 사이를 평화롭게 노 젓고 다녔고, 그 후에도 섬사람들을 상대로 무역하는 조그만 목선들이 어쩌다 가끔씩 이 아름답고 고요한 산호해에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 일본 양국의 항공모함이 이 곳을 무대로 인류최초의 대결전을 전개하려고 한다.' 어떤 이는 이런 대목 때문에 여행기와 전사가 절묘하게 섞인 책이라고 절찬했다. 여태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전쟁초기 미국을 몰아붙였던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대장은 형이 목사를 지낼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군인이 된 후 교인임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일본 현장 취재로 밝혀냈다.

그는 지금 '헨더슨 비행장'속편을 준비중이다. "원래는 일본의 항복까지 아우르는 책을 쓸 생각이었는데 이 책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나이가 많아 한분 두분 돌아가시는 바람에 빨리 마무리, 그들에게 바쳐야 겠다는 생각에서 우선 헨더슨 비행장 전투까지만 쓰게 되었다.

이제는 시간을 갖고 더 많은 자료로 책을 완결할 생각이다." 그가 책을 바친 사람들은 헨더슨 비행장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조종사들과 일본군 장교 및 그 가족들로 그에게 전쟁의 비극을 증언해주었다.

앞으로도 몇 년간 그는 새벽이면 컴퓨터 자판을 두들길 것이다. 솔로몬군도에서 외롭게 숨져간 한인들을 위해.

"전력이 앞선데도 일본이 패한것은 우연아닌 神의 뜻"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원래 군인이 될 생각이었다. 사관학교에 들어가려던 그는 사관학교 입시일이 일요일이어서 포기했다.

어릴 때부터 일요일에는 예배를 보고 개인적인 일이나 놀이는 삼가온 게 몸에 뱄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진학하고서도 군인이 되려는 꿈 때문에 학군단(ROTC)에 들어갔으나 일요일 훈련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지금 직장에 들어간 것도 일요일과 관련이 있다.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내로라 하는 회사들은 모두 일요일에 입사시험을 보고 있어서 평일 입사시험을 봤던 이건산업을 직장으로 택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한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파푸아 뉴기니에 도착해 여기저기 널린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보는 순간 어릴 때 잡지에서 읽었던 남태평양 전쟁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꼭 한 번 남태평양에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일도 떠올랐다." 어릴 때의 소원이 이뤄지게 됐음을 그날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진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전쟁사가는 미국의 잠재적 경제력이 일본보다 뛰어났고 전략전술도 좋았기 때문에 미국이 이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일본 군대는 잘 훈련되어있었고, 화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미드웨이 해전과 헨더슨 비행장 전투가 벌어질 때만 해도 일본군의 함선과 비행기, 전투병력은 숫자에서나 훈련정도에서나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이 진 것은 지휘관의 어리석은 판단과 일본군에 불리한 날씨 때문이었다.

누가 일본군이 어리석은 판단을 하도록 하고, 날씨까지 불리하게 만들었던가. 이건 하늘의 뜻이 아니면 안 된다.

옳지 못한 전쟁을 벌인 일본군은 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일본이 성경의 제1계율,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신도(神道)를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_그런데도 일본은 전후 눈부신 발전을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진정으로 아끼는 자식을 위해 미운 자식을 잘 되게 하는 때도 있다.

일본은 전쟁에 지고도 하나 변한 것이 없다. 해상자위대 군함에도 예전 태평양전쟁에서 침몰한 군함이름을 붙여오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전쟁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 일본의 발전은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

편집국 부국장

so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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