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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시인' 과기부장관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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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시인' 과기부장관에 거는 기대

입력
2001.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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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엄청난 개각이 단행됐다. 개각이 잦음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호르몬의 기복이 너무 심하다.민주주의 선진국에는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는 장관들도 심심찮게 있건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임기 내내 자신의 구린 과거를 줄기차게 들춰낸 법무장관은 물론 공화당 출신의 국방장관도 경질하지 않았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이번 개각은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취지에 비춰볼 때 이번 개각이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투명인간도 그림자만은 감출 수 없었듯이 이번 개각의 등뒤에는 흥정, 타협, 압력 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다.

한 동안 언론과 야당의 비난이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강한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연합여당을 만들기 위하여 장관 자리를 적절히 안배했음을 부인하지 않는 걸로 보아 국가 위기보다는 정치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 더 급했던 모양이다.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내가 이번 개각에서 가장 관심을 쏟았던 부분은 당연히 신임 과학기술부 장관의 배경과 철학이다.

다른 부처들이 워낙 중요해서인지는 몰라도 과기부 장관에 대해 보이는 언론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개각에서 어떤 의미로 가장 파격적인 인사가 벌어진 곳이 바로 과학기술부인지도 모른다.

종전의 장관들에 비해 줄잡아 한 10년은 젊은 장관이고 과학기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우선 다르다. 이 땅의 과학기술자들이 조금은 걱정스러워 할 요인들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젊은 새 수장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야릇한 희망을 느낀다. 나와 같은 해에 대학의 문을 들어섰다는 점에서 어쩌면 비슷한 고민을 하며 젊음을 보냈고 또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비슷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5년을 주기로 변화를 겪었다는 그의 인생 역정에 과학의 백년대계를 맡겨도 될 지 의심도 해보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탁월한 수완을 보인 그의 남다른 능력에 역시 기대를 걸어본다.

가난을 딛고 일어선 경험을 바탕으로 "땀 냄새가 물씬 나는 장관이 되겠다"고 말한 그의 다짐에 또한 기대를 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그에게 기대 이상의 큰 희망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의 인문학적 소양 때문이다. 그가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라는 점에 한없는 매력을 느낀다.

과학기술부의 수장이 시인이라는 사실이 무에 그리 즐거운 일이냐고 반문할 이들도 있겠지만 학문의 근본인 인문학으로 무장한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근본인 기초과학을 이해하는 장관이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런 장관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흥분마저 끓어오른다.

영국의 낭만시인 워즈워스는 일찍이 '구두끈' 하나 사주지 못하는 게 시라고 탄식했지만 시가 없는 인류 문화를 그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으랴.

당장 돈이 되는 것 같지 않은 기초과학은 바로 과학기술의 시다. 괴테의 시어들이 독일어를 가장 화려한 문학언어로 만들었듯이 기초과학의 시어들이 풍부해져야 우리 나라 과학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수 있다.

문학계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애정소설이나 써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어야 하듯 당장 돈 몇 푼 쥐어줄 기술에만 목을 매면 우리의 미래는 늘 그 모양 그 꼴일 것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언뜻 배부른 짓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기초과학의 발전 없이 기술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다.

당장 먹고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온 가족이 다 껌팔이로 나서면 오랫동안 껌팔이를 할 수밖에 없다. 우선 입에 풀칠은 해야 하지만 가족 중 누군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잠시 허리를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가난의 멍에를 벗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신임 장관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일이리라.

지난 몇 년 간 우리 정부가 연구개발비로 책정한 예산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나라 GDP에 비춰볼 때 전체 예산에 대한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한 마디로 체면은 그런 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책인 셈이다. 하지만 비율이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액수가 문제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이미 월등하게 앞선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이 투자하는 규모에 비해 너무도 비교가 안 되는 규모를 가지고 무슨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것이 뻔한 이유는 둘 간의 기본 속도의 차이 때문이다.

옛 이야기처럼 토끼가 낮잠을 자줄 리 없고 보면 거북이가 토끼를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초 체력을 기르는 일뿐이다. 삶의 기본을 터득한 듯 보이는 신임 시인장관에게 조심스레 과학의 르네상스를 기대해본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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