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무렵의 일이다. 제과점에서 빵을 사준 친척형이 물었다. "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니?"그 때는 맛있는 빵을 먹고 있던 중이어서 그 말이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형의 말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어린 그때에 이미 알아 버린 모양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불과 백년전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은 47세였고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러 방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내가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사람들의 사랑도 꿈도 말 그대로 기약할 수 없던 이별까지도 지금보다 더욱 강렬했던가 보다.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다룬, '예언과 주술의 시대'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은 살아있음과 죽음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생명을 대하는 그때 사람들의 소박한 태도에서 과학 문명의 시대에 사는 지금의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앎'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단편소설에는 자신이 들어갈 관을 맞추어 놓고 돈이 더 생기면 더 좋은 관으로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관 안에 누워 보기도 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도 자신이 쉴 유택을 만들어 놓고 자주 가보는 것이나 자신이 입고 갈 수의를 음력 윤달에 자식들에게서 선물 받고 싶어하는 어르신들의 마음에 공감을 하게 된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평균수명은 100년 전에 비해 30년이 늘어났다. 그래도 죽음은 그저 전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일 뿐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싶어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부고장을 받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으며 가까운 사람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가시는 분은 이제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는 가장 약하고 고독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차가운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그 곳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을 모두 새로운 환경에서 외로이 견디어내야 한다.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의료통계에 숫자 하나를 더하기
위해서 가끔 평생 모은 재산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족들과도 점차로 멀어지다가 마침내는 고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하나 보여줄 뿐
정작 시신은 영안실 냉동고에서 발인날만을 기다린다. 부음을 듣고 발인하기 전, 시간 맞춰서 빈소를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돌아가시기 전에 여유를 가지고 얼마 안가서 고인이 될 분을 한번쯤 찾아 뵐 일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다 갈 권리를 주는데 너무 인색한 것은 아닐까. 단지 조금 늦게 죽는다는 이유 하나로 그 분들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떠들썩하고 깨끗이 잘 포장되어 상품화된 죽음은 이제는 바뀌었으면 좋겠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배려하는 일일 것이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죽음이라고 왜 의미가 없겠는가.
사람의 일인지라 나 자신도 나중에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어떤가 ?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인 삶은 이미 끝났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의학적인 삶을 연명하는 것이 좋을까 ? 슬퍼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따뜻한 가족들 품에서 담담히 떠나는 것이 좋을까 ?
한상근ㆍ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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