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현역이 말하는 의사의 길' 문창모VS 이기섭"건강하십니까. 선배님." 구순의 선배를 만나기 위해 미수(米壽)를 넘긴 후배가 달려왔다. 70년을 하루같이 인술을 배풀어오다 31일 폐업을 앞두고 있는 현역 최고령 의사 문창모씨와 19년째 무의촌 진료를 하고있는 여든 여덟의 이기섭씨가, 세월의 더께가 낀 원주 문이비인후과 진료실에 마주앉아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의사의 길을 이야기했다.
문창모(文昌模) 1907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2년 평양기독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으며 경기도립인천병원장 세브란스병원장 원주기독병원 초대원장 등을 지냈다.
64년 원주에 문이비인후과를 개업, 운영해오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31일 70년에 걸친 의사생활을 마친다.
국민훈장모란장, 일가상 사회공익부문을 수상했고 인간상록수로도 선정됐다.
92년에는 최고령으로 14대 국회(국민당 전국구)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기섭(李基燮) 1913년 황해도 수안에서 태어났다. 3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며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적십자병원 외과과장, 이화여대부속병원장 등을 거쳐 62년 속초에 이기섭외과의원을 개원했다. 속초 강원도립의료원 외과과장을 지내다 82년 사임했으며 이듬해부터 양양의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중외제약 의료사회봉사상, 보령제약의료봉사상 등을 수상했다. 산악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현재 한국산악회와 설악산악연맹 고문으로 있다.
_ 두 분이 잘 아시는 사이인가요.
▦이기섭 = 그럼요. 제 대학 선배지요. 49년부터 7년간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습니다. 선배님은 병원장이었고 저는 그냥 의사였지요. 선배님은 그때도 감리교 신앙을 바탕으로 환자를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문창모 = 이제 보니 우리 이선생 머리가 하얗게 샜네요. 이선생, 참 성실하고 좋은 의사였어요. 같이 근무하던 그때만해도 의사들은 출근도 잘 안하고, 지각도 자주 했는데 이선생은 그런 일 한번도 없었어요.
_ 두 분은 어떻게 해서 의사가 됐습니까.
▦문창모 = 배재학교를 다니던 26년 6ㆍ10만세 사건이 났어요. 동참하려다 일경에 체포되는 바람에 세 달간 감옥신세를 졌습니다.
기소유예로 나오긴 했는데 그 뒤 시험도 제대로 못보고, 백지 답안도 내는 바람에 117명 중 97등, 거의 꼴찌가 돼버렸어요.
진학은 해야 하는데 감옥갔다 왔다는 이유로 관립 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가장 센 세브란스 한번 쳐보자고 했지요. 그때 세브란스는 경쟁률이 10대 1을 넘었는데 다행히 붙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사가 됐지요.
▦이기섭 = 황해도 시골에서 자랐어요. 일제 땐데 그때는 공의(公醫)라 해서 군(郡)에 의사가 한 명 밖에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었지요.
어머님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간경변으로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어요. 해주고보를 다니다 노예교육에 반대, 동맹휴학하다 퇴학당한 뒤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가 중학교를 나왔습니다.
와세다(早稻田)로 갈까 했지만 어머님이 떠올라 세브란스로 갔습니다. 선배님은 의사생활을 마감하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문창모 = 후회없이 의사생활 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환자를 보려고 했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신경기능이 떨어지고 손이 말을 듣지 않아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31일 오후5시에 병원 문을 닫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지 몰라요. 울면서 그만 둡니다.
_ 의사로 활동하면서 힘들거나 그만두고 싶은 때는 없었습니까.
▦문창모 = 없었어요. 직업이 5만~6만가지나 된다지만 의사는 아픈 사람 낫게 하고, 목숨을 살리는 가장 좋은 직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환자가 있는 한 진료는 해야지요. 국회의원 할 때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환자 보고 여의도 국회로 갔어요.
다시 오전 11시 반쯤 여의도를 출발, 오후 2시쯤 원주에 도착해 환자를 보았습니다.
여의도로 다시 가서 저녁에 열리는 국회 활동하다 한밤중에 돌아왔으니 하루 두 번 왕복한 셈이지요. 잠도 못자고 밥도 굶은 적이 다반사였습니다.
▦이기섭 = 외과라서 수술을 많이 했는데, 끝내 살아나지 못한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아팠고 혹시 내 잘못은 아닌가 하는 '양심의 가책'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그만 두고 싶은 때는 없었어요.
_ 의사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습니까.
▦이기섭 = 76년 속초 도립의료원에 있을 땐데, 양양에 사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배를 움켜쥐고 들어와요. 복막염이었어요.
강릉의료원에서 수술받으려 했는데 보증금 10만원이 없어 수술을 못했답니다. 제가 수술을 했는데 이틀만에 죽고 말았지요.
맹장염, 충수염 단계면 고칠 수 있지만 그때 치료 못하면 복막염이 되고 치료도 어려워집니다. 질병은 예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그 때문에 무의촌 예방 진료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문창모 = 10년 전쯤 경찰이 한 죄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과부와 아이 둘을 죽인 흉악범인데 유치장에서도 고함을 지르고 소란을 부려 귀에 이상이 있는지 봐달라는 것이었어요.
치료를 하면서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세상에 죄없는 사람 있느냐, 예수를 믿어보라고 했지요. 그 사람 그 뒤 사형됐는데 죽으면서 원주 문선생 덕에 천국 간다고 하더랍니다.
_ 두 분은 의료 봉사활동도 많이 하셨는데요.
▦문창모 = 원래 집안이 넉넉한 편이라 돈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어요. 열 두살때부터 감리교를 믿었는데 그 덕에 38년 감리교 사회국 위원장이 되면서 봉사에 눈을 떴습니다.
백령도에서 공의로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어업자금을 빌려주기도 했고 원주?인천에 기독병원도 세웠습니다.
월남, 방글라데시까지 가 무료진료를 해주었지요. 돈 없는 환자는 치료비를 받지 않고 도리어 여비까지 쥐어준 일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기섭 = 82년 은퇴한 뒤 자식들 만나러 미국에 한번 갔었습니다. 노인들이 무료로 혈압도 재고 진료도 받으려고 백화점에 줄서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선진국인데도 예방 체계가 잘 돼있는 것이 부러워 무의촌을 찾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양양군 서림리, 황이리, 갈천리, 영덕리 4개 마을을 목요일마다 시외버스 타고 찾아갑니다.
요즘은 마을에 노인들만 있는데 골다공증이 많습니다. 하지만 약이 비싸 내과 의사하는 셋째 딸 도움을 받습니다. 19년째 되다 보니 마을 경조사 있으면 꼭 부릅니다. 주례도 섰지요.
▦문창모 = 무료진료 받고도 저게는 고마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 선생 이야기 들으니 좀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_ 문선생님은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아는데요. 그 분이 작고해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문창모 = 72년 조찬기도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가까워 진 건 85년 연세대 100주년 기념식에서 함께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부터입니다. 그 뒤 형, 동생하며 지냈지요.
원주 오면 일부러 저를 찾아올 정도였어요. 92년 정치한다며 제게 전국구를 신청하라 하더군요. 워낙 간곡히 부탁해 쓰기는 썼습니다.
그런데 덜컥 전국구 1번으로 올려놓았더군요. 100살까지 살고 나중에 함께 세계일주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가버리다니 참 마음이 아픕니다.
_ 하지만 문선생님은 아직도 건강해 보이는데요. 장수비결이 있습니까.
▦문창모 = 오래 사는 것은 타고 나는 것 같아요. 백살 된 누님도 있고 여든 넷 된 동생도 있습니다. 술 담배는 안 하지요. 채식이 좋다지만 육식을 즐깁니다.
오전 7시 아침, 낮 12시 점심, 오후 5시 저녁 이렇게 끼니를 거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새벽부터 환자를 보았지만 지금은 10시간 이상 푹 잡니다. 손이 좀 떨리고 청력이 떨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건강하지요.
▦이기섭 = 저도 잘 먹고 잘자고 운동 많이 합니다. 등산은 특히 좋아하지요. 서울서 속초로 간 이유 중 하나도 설악산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속초에서는 설악산악회 회장을 맡아 65년부터 산악축제인 설악제를 열고 있습니다. 백담사_대청봉_양폭_비선대 등산로를 개척, 정비하기도 했어요.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포도주는 한 잔 정도 마십니다.
_ 지난해 의사 파업 등으로 의사에 대한 불신이 아직도 높습니다. 후배 의사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문창모 = 어떤 일이 있어도 의사는 환자를 버리면 안됩니다. 아픈 사람 고치고 죽을 사람 살려내는 직업입니다. 환자가 돈이 없더라도, 혹은 원수라도 봐줘야지요.
▦이기섭 = 속초와 양양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제가 치료해주거나, 무료 진료활동하면서 보아준 사람이지요.
그들이 아는 척 할 때마다 뜨끔해집니다. 혹시 내가 불친절하지 않았나. 의사는 봉사하는직업입니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습니까. 젊은 의사들 너무 돈벌이에만, 경쟁에만 매달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의약분업도, 의보재정 문제도 의사, 약사와 충분히 상의해야 할 겁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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