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관심사는 라면"이라는 정용인(24)씨. 하루 세끼 라면만 먹고 살아도 즐겁고 라면 요리법을 수십 가지 알고 있으며 가입한 동호회만 5개다. 라면의 역사나 종류를 줄줄이 꿰는 것은 기본이고 면을 삶을 때 온도가 미치는 영향, 밀가루가 물과 섞일 때의 화학적 변화등 라면에 대한 연구의 깊이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프라모델 마니아인 대학생 이지훈(21)씨는 한달 용돈의 대부분을 프라모델 구입에 쏟아 붓고 있다. 하지만 "수입의 3분의 1을 투자할 자세가 아니라면 진정한 마니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문화, 다양화, 세분화하는 마니아의 세계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문화의 영역이 다양해지면서 마니아 집단이 형성되는 분야와 장르도 다양해지고 있다. 버려지는 토끼를 위해 기부금까지 모으는 토끼마니아들, 샘플로만 생활한다는 샘플마니아, 교복에 어울리는 스타킹, 교복을 예쁘게 입는 법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교복마니아들도 있다. 흑백 남자사진 만을 모으거나, 신기한 모양의 피임기구를 수집하는 등의 특이한 취향의 사람들까지도 하나 둘 씩 모여들어 모임을 형성하고 있다.
드라마나 책, 영화 등 특정한 대상에 대한 마니아 집단이 형성되는 것도 새로운 모습이다. 영화 '록키호러 픽처쇼'나 '주유소습격사건'등의 장면을 정기적으로 재현하는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TV시리즈물 'X-파일'의 주인공들이 하고 나온 엑서세리 하나 하나 까지도 분석하는 마니아들도 있다. 최근에는 '해리포터' 마니아들이 수업이 등장했으며, '아줌마'나 '태조 왕건'등 인기드라마, '키스'등 일본만화, '포트리스' '스타크래프트'등의 PC게임 등 특정대상에 열광하는 마니아 집단이 등장하고 있다.
마니아집단의 등장 배경
마니아 집단이 본격 등장하게 된 것은 1990년대의 탈정치적 분위기와 문화소비력의 확대 등에 기인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공동체문화에 대한 무관심이 개인적인 관심사에 열정과 돈을 쏟아 붓게 했다는 것.
PC통신과 인터넷의 확산도 큰 역할을 했다. 전문적인 수준의 정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놀라운 속도로 전달되는 데다, 사이버 공간에서 어렵지 않게 동료들을 마나 정보를 교환하고 '동지의식'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황상민(연세대 심리학과)교수는 '사이버 세상이 세계관을 변화시켰다'고 설명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정보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 성공하는 등 판에 박힌 목표에서 벗어나 관심과 기호가 다양해졌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발견해 자아를 확립하고 온라인 동호회등을 통해 '관심의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마니아 집단의 힘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마니아 집단은 단순한 '팬'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한다. 가령 HOT의 팬들이 이들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붓고 그들의 노래와 사진을 수집하는 데 그치는 반면 마니아라면 경쟁 가수들의 노래까지 연구하고 비평한다는 것.
실제로 프로야구, 농구 등의 마니아들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문가 뺨치는 분석과 전망을 내놓아 경기운영, 트레이드나 선수 스카우트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특정 상품의 마니아들은 신체품 개발에 영향력을 끼치는 조언자로서 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성욱 성공회대 강사는 이 같은 현상을 대중문화의 신장과 연관시켜 이야기한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생산자가 전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방통행식 매카니즘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향유하려는 이들이 확산됐다는 지적이다.
공동체문화와 조화시켜야
마니아 문화가 순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좋아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잠자는 시간도 아깝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차츰 고립된 '자신만의 방'에 틀어박히게 돼 비현실적이 되어 간다.
최근 게임중독과 관련해 잇따라 발생하는 사고도 PC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겪는 '현실과 괴리현상'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때문에 마니아문화와 공동체문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개성'과 '전문성'을 중요시하는 밀레니엄 시대의 특성상 다양한 취미에 천착하는 '마니아' 집단은 더욱 다양화, 세분화하며 세를 늘려갈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지형기자
misty@hk.co.kr
■"취미가 밥먹여 주네"
세이클럽에서 피어싱 동호회 '살을 뚫는 쾌감'을 운영하고 있는 신지선(21)씨. 입술, 코, 눈썹, 귀, 혀 심지어 배꼽과 가슴에까지 피어싱을 한 그는 얼마 전 홍익대 앞에 피어싱 전문숍을 열었다. 피어싱 초보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피어싱 정보를 알려 주고 자연스레 다른 마니아들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돈까지 벌 수 있어 누구보다 즐거운 직업을 택한 셈이라고 말한다.
월간 게임잡지 'PC게임짱'의 기자인 최승훈(19)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PC게임에 몰두해 온 게임마니아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인터넷에 게임웹진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돼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자로 스카우트 되는 행운을 얻었다.
"월급의 액수를 떠나 게임 잡지를 직접 만든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라고 한다. 이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 마니아들의 바람이다. 앨빈토플러가 예견했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형태인 생비자(生費者)가 대거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가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인식 역시 마니아 문화의 확산이 낳은 결과이다. 프로게이머 이형주(15)군은 PC게임 '피파2001' 로 각종 프로게임대회를 석권해 이미 지난해 청강정보산업대학의 입학자격을 얻어놓았다.
프로게이머 중에는 연봉 1억을 웃도는 이들도 있어 PC게임마니아들에게는 장래희망직업 1순위로 꼽힐 정도다. 각 대학에서도 이처럼 독특한 특기를 지닌 마니아들에게 입학의 문을 넓히고 있어 발명, 영화, 바둑 등 과거에는 한낱 취미에 불과했던 것들도 대학입학의 기준이 되고 있다.
기업체에서도 독서, 영화감상 등 두루뭉실한 주제로 취미란을 채우는 이들보다는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지닌 특기자를 우대하는 추세여서, '마니아가 우대 받는 세상'이 본격 열리고 있는 셈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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