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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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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전봉준

입력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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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3월29일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이 서울에서 처형됐다. 향년 41세. 그 전해 공주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대격전에서 패한 그는 순창으로 피신해 동지들과 함께 재기를 모의하던 중에,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의 재판 기록은 전봉준 공초(供草)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1894년 1월의 고부 봉기에서 시작해 그 해 10월 금구싸움으로 마무리되는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를 향한 조선 민중의 몸부림 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처절한 장면이었다.

이 농민 전쟁의 비극적 마무리로 결국 조선은 그 뒤 식민화와 뒤틀린 근대화를 겪게 되거니와, 이 전쟁 또는 운동의 한 가운데 있던 사람이 전봉준이었다. 녹두 장군 전봉준에 대한 민중의 애정과 기림은 민요 '새야 새야'의 가사에서도 또렷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제폭구민(除暴救民)ㆍ진멸권귀(盡滅權貴)ㆍ축멸왜이(逐滅倭夷)라는 이 운동의 표어가 운동 주체들의 종교적(동학교도적) 감수성때문인지 계급적(농민적) 감수성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아무튼 그들은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 지형도 안에서 최고의 진보성을 대표했고, 그 진보성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지배 세력은 나라를 외세에 내주는 길을 택했다.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그해 4월 전주를 점령해 전라도 지방에 미숙한 형태의 코뮌으로서 집강소를 설치했을 때, 그들은 시인 신동엽의 말을 빌면 "하늘을 보았다." 이 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그러나 슬프디 슬픈 분수령이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의 옛집은 '전봉준 선생 고택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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