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3월28일 일본 메이지(明治)ㆍ다이쇼(大正)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타계했다. 향년 69세.우치무라는 일본 기독교의 무교회주의를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감화를 받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한국의 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애머스트 대학과 하트포드 신학교 등에서 공부한 그는 1888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의 다이이치(第一)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죄로 해직된 뒤 직업적인 저술가가 되었다.
1900년 '성서연구'지를 창간하며 무교회주의를 표방한 우치무라는 그 뒤 선교에 전념하며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해 일본인들 스스로 기독교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무교회주의란 교회주의 곧 '조직화된 제도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의에 반대하는 신앙과 신학사상이다. 우치무라는 교회의 유무나 세례의 유무는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성서에 의지하는 무교회주의가 진정한 기독교라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대담한 반전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같은 이들이 무교회주의 사상가가 되었고, 한국인 가운데서도 김교신 함석헌 같은 무교회주의자가 나왔다.
우치무라에게 직접 배우기도 한 김교신은 1927년 귀국해서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동인지 형태의 월간지 '성서조선'을 발간했는데, 이 잡지가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의 본산이었다.
우치무라의 격언 한 토막: "사랑에 공포는 없다, 최상의 도덕이므로. 사랑에 의혹은 없다, 최대의 진리이므로. 사랑에 속박은 없다, 참다운 자유이므로."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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