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경기전망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공식기관의 각종 경제전망은 종종 빗나가지만 자체 개발 지수인 'R-Word Index'는 예측력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R은 경기침체를 뜻하는 Recession의 머리글자로, 이 지수는 주요 언론기관에서 경기침체를 언급한 횟수를 기초로 한다. 언론에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해 지수가 높아질수록 경기전망은 어둡다는 것이다.
이 지수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얼어붙었던 민간소비심리가 2개월째 회복세를 이어가고, 기업체감경기도 개선추세로 반전됐으며,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잇따라 한국 경제에 대한 낙관론을 펴고 있다고 최근 언론은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내용보다는 어두운 기사들이 더 많다. 실업자 수가 다시 100만 명을 넘어서고, 증시는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은행에서 받는 이자는 갈수록 적어지지만 물가는 뜀박질을 하고 있다.
또 언제 직장에서 해고될지도 알 수가 없다. 여기에 교육문제까지 가세해 사람들도, 돈도 급속히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국민들이 직접 피부로 느끼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대통령의 언급이 상징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 말 "우리 경제가 지금 나쁜데 대해 대통령으로서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경제를 직접 챙기겠다고 선언한 것은 수 차례 되지만, 경제문제를 놓고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취임이래 처음이었다.
대통령은 또 얼마 전 공교육 위기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약분업 문제는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러니 지수는 상당히 높아 앞으로의 경기가 심히 걱정된다는 분석이 나올 것이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나태했기 때문일까.
일본의 경우를 보자. 한때 세계 경제의 기관차임을 자부했지만 이제는 '일본 발(發) 세계 공황'이 논의될 정도가 되었다.
지난 10년간 130조엔이라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고, 제로에 가까운 저금리 정책을 폈지만 경기는 회복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 빚이 국내총생산(GDP)의 130%가 넘어 재무상은 재정이 파탄상태임을 선언했고, 총리는 경제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정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는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최대 책임은 국가전략도 이념도 없고, 다만 내부의 인간관계만으로 지도자를 계속 뽑아온 정치에 있다"고 지적했다.
헤이세이(平成) 연호를 사용한 1989년 이후 현 총리는 10번째로, '총리 만들기'의 생산성만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인 로버트 펠드먼은 최근 도쿄에서의 한 강연에서 '주기적 위기론'을 제시했다.
일본은 지난 10년간 수 차례의 경기부양책을 시행했지만 상황이 다소 개선되면 위기의식이 둔해져 다시 어려움을 맞는 순환을 3차례나 되풀이해 왔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고비마다 정치가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며칠 전 낸 보고서도 같은 내용이다. 경제가 잘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정책이 우선이지만, 마지막 순간에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인 것이다.
우리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은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며 우리가 일본처럼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몇몇 연구기관의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전에도 이와 비슷한 주장들이 많았다. 우리는 남미나 동남아 국가들과는 근본적으로 틀려 IMF행(行)이라는 불행한 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정말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안 밟아도 될까.
이 상 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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