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 미국 정부는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던 러시아 외교관 6명을 추방하고 45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3~4개월 내에 미국을 떠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이에 대응해 러시아도 미국 외교관 50명을 '기피인물'로 규정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양국 사이에는 냉전 종식 이후 최악의 외교적 갈등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대규모의 외교관 맞추방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갈등의 이면에는 양국간의 외교노선의 차이와 국제문제 현안에서의 이견과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은 냉전종식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주요 국제문제의 해결사 노릇을 해왔다. 특히, 지난 1월에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힘을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도 1990년대 중반이후 종전의 친서방 외교정책을 대폭 수정해 국익우선의 '전방위 외교'를 기본노선으로 채택하면서 미국의 독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특히 작년에 취임한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에 치우쳐 있던 외교활동의 무대를 동북아, 동남아, 중동 등지로 넓히는 한편으로 대외정책의 수행에 있어서 국가이익의 관철을 거듭 강조해왔다.
양국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실리외교노선은 코소보 사태, 이라크 공습, 이스라엘_팔레스타인 분쟁 등 지역분쟁과 주요 국제문제 이슈에 있어서 이견과 대립을 자주 노정시켜왔다.
그런 가운데 현재 양국간에 가장 큰 현안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미국이 강행하려 하고 있는 '국가미사일 방어(NMD)'' 체제의 구축 문제이다.
미국의 NMD 계획에 대해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미국과 거의 대등한 전략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국가미사일방어체제가 구축될 경우 전략적 균형이 일거에 깨지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해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NMD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나아가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이를 위해 지난 1972년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조약의 폐기 또는 탈퇴까지도 거론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그러한 갈등기류가 지속되는 상황은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한간의 화해와 협력을 진전시켜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 있다.
양국관계가 악화될 경우 남북한 협력과 화해를 적극 지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개발을 둘러싼 논란에서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온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더구나 NMD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이 군비경쟁으로 이어지기 쉽고 그것은 동북아 지역에서도 군비경쟁을 자극하고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
이는 한반도의 평화유지와 남북한 협력의 진전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 외교관 맞추방 사건이 양국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악화시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신냉전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성급한 전망도 하고 있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는 별도로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를 지속할 뜻을 분명히 했다.
또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러시아 언론 등의 과민반응을 지적하면서 외교관 추방사건이 지나치게 확대해석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간의 관계가 불협화음을 낼 때 특히 우리는 신중하고도 현명하게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지난달 한렁?정상회담에서 ABM 조약의 존속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미국을 자극한 것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해서도 안되겠거니와 지나치게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적 타성으로부터도 탈피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국제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외교에 있어서 균형감각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장덕준ㆍ 국민대 국제 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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