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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神話 / (下)안되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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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神話 / (下)안되면 되게 하라

입력
2001.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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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의 이 저서명은 '인간 정주영'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회자된다.

외국기업인들도 "한국인의 '하면 된다 정신(Cando-spirit)'하면 정주영씨를 떠 올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일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고인은 많은 사람에게 순탄대로를 달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건설, 자동차, 중공업, 시멘트사업 등 새 사업에 손댈 때마다 엄청난 위기에 직면했으며 때론 망한 적도 있다. 이 때마다 그는 벼랑 끝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상황을 반전(反轉)시켜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500원 지폐로 조선소 건설자금 확보

1970년대 초 현대중공업 건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 그는 선박건조 기술을 전수해 줄 선진기업과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 줄 금융기관 및 보증기관을 찾아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A&P애플도어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기로 했으나 조선소 건설 자금이 문제였다.

당시 국가 재정조차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허허벌판에 불과했던 울산 황무지에 조선소를 지으라고 돈을 대줄 은행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찾기'만큼 어려웠다.

수 개월 동안 고생한 끝에 영국 버클레이즈은행 롱바톰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톰회장이 "배를 사갈 사람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주는가"라고 묻자 그는 대뜸 바지 속에 있던 500원 짜리 지폐를 내보이며 "우리는 400백년전에 이런 거북선을 만들만큼 선박분야 잠재력이 뛰어난 나라"라고 말했다. 자신감 넘친 이 한마디는 은행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금을 대출받는데 성공했다.

현대중공업이 기반에 오른 70년대 중반, 오일 쇼크가 몰아닥쳤다. 초대형 유조선들을 건조해놓았으나 조선경기가 침체하면서 계약자들이 인수해가려 하지 않았다. 자재 공급업체들은 하도급대금을 내라며 아우성을 쳤다.

경리담당 간부들이 연일 사색이 돼 사장실로 뛰어왔다. 수십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던 그는 재고 상품(유조선)으로 아예 수송회사를 설립키로 결심한다. 현대상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현대상선은 당시 국내에 반입되던 원유를 직접 수송해 국가적으로도 많은 외화절약 효과를 거뒀다.

81년 당시 정부가 88올림픽을 개최하겠다고 선언은 했지만 대부분 관료들은 '올림픽위원 82표 중 기껏해야 3표 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며 아무도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민간인인 정 명예회장(당시 전경련회장)을 위원장으로 앉혀 독일 바덴바덴으로 보냈다.

당시 바덴바덴에서는 차기 올림픽 후보지가 이미 일본 나고야로 기정사실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올림픽 위원들의 방에 정성스럽게 만든 꽃바구니를 보내는 '플라워 이벤트'로 물줄기를 서울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해보기나 했어?

"해보기나 했어?" 이 말은 그가 임직원들에게 가장 빈번히 사용하던 말이었다.

본인 스스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갖은 아이디어를 다 짜내 성공시키곤 했기 때문에 직원들이 노력해보지도 않은 채 머리를 내젓는 상황을 보면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지금 현대 계열사를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 가운데 시도해보지도 않고 반대 의견을 냈다가 뺨을 맞은 사람도 많다.

경제인들은 그러나 그의 은퇴 시기가 더 빨랐어야 했다고 애석해 하고 있다. 개발시대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하지 않던 90년대 후반까지도 가부장적 1인지배 체제로 현대를 장악했던 것이 사세하락을 자초했다는 판단에서다.

조기에 후계 구도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아 결국 '왕자의 난'까지 발생한 것이나, 금강산 관광사업 대가로 선뜻 1조원을 약속한 '왕회장'의 약속이 계열사에 큰 주름살을 안겨준 것, 무리한 대선출마 등은 대표적 예다.

난국이 닥칠 때마다 정면으로 맞서 극복했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 매일 그날 할 일이 즐거워 '소풍가는 날 아침'기분으로 맞았다던 고인. 그에 대한 공과평가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그의 기업가적 정신만은 세계 경영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王회장의 방' 검소함 물씬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생전에 기거했던 방은 '연매출 100조원 규모의 기업을 일군 사업가'라는 명성과는 전혀 걸맞지 않았다.

22일 현대가 언론에 공개한 서울 청운동 자택 2층 왼쪽의 안방은 10여평 남짓한 규모에 바닥에는 커다란 흰 광목이 깔려 있었다. 가구라곤 침대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간이침대, TV, 책장, 책상, 가습기 2대, 온ㆍ냉풍기 2대가 전부였다. 책장도 모서리가 닳아 한 눈에 수십년된 물건임을 알게했다.

책장에는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한 수백권의 책과 MBC 사극 '조선왕조 500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다큐멘터리 '북한산은 살아있다', 대선 당시그의 연설 장면이 담긴 테이프 등이 꽂혀 있었다.

사이드 책장으로 쓴 듯한 고가구에도 고인이 즐겨 썼던 밀짚모자와 중절모, 현대 마크가 선명한 모자 등이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속옷과 양말 은 당장이라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수구초심(首邱初心). 침대 옆에는 고인의 고향 통천인 듯한 북한마을 풍경사진을 몇장 붙여 만든 기다란 사진이 눕혀져 있었다.

안방의 29인치 TV는 옛 '골드스타(goldstar)'상표. 그가 최근까지 거실에서 10년이 넘게 시청하던 17인치 TV는 기념관으로 옮기기 위해 별도로 보관됐다.

명예회장 비서실 관계자는 "명예회장은 아무리 좋은 가구를 들여놓으려 해도 만류하곤 했다"며 "평소 백화점에서는 팔지 않는 두터운 양말만 신었기 때문에 항상 남대문에 가서 양말을 사와야 했다"고 말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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