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ㆍ23(한보철강 부도)'에서 '12ㆍ3(IMF양해각서 서명)'까지. 한국경제는 1997년 한햇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청룡열차'를 타야 했다.1월 23일 한도철강이 부도처리됐다. 이것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서막이었다. 12월 3일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캉드시 IMF 총재는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이 날은 한국이 IMF의 '경제신탁통치'에 들어간 '경제 국치일'이다.
김영삼(金泳三ㆍ이하 YS) 전 대통령은 지난달 발간한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을 통해 문민정부 5년간의 경제정책비화를 적지 않게 털어놨다.
경제기자로서 가장 흥미를 끈 대목은 97년의 환란(외환위기)과 IMF체제였다. 국정최고책임자로서 YS는 어떤 고민을 했고, 참모들은 무슨 대책을 강구했을까.
"11월 10일 오후3시가 조금 못 되어 . 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IMF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외환이 부족해 잘못하면 국가부도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하권 352쪽)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부도나다니.. 회장격인 YS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국정운영의 난맥상이 드러난다.
경리부장격인 재정경제원 장관(강경식ㆍ姜慶植 부총리)과 회장비서실 재무팀장격인 청와대경제수석(김인호ㆍ金仁浩)은 그 동안 YS에게 무슨 보고를 했단 말인가. 또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한국은행총재는..
국정최고책임자에게 '국가 부도'를 경고한 사람은 정부 안의 사람이 아닌 정부 밖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당시 홍 전 부총리는 야당인 국민신당의 정책위의장 신분으로 이인제(李仁濟)대통령후보의 경제참모였다. 이는 YS의 경제정책라인이 완전히 와해됐었음을 뜻한다.
"나는 아픔을 삼키며 IMF 양해각서를 수용했다. . 가장 어려운 그 시점에 내가 있었고, 나는 기꺼이 아픔을 감내하려 했다."(367쪽) 정책실패를 자인한 담담한 서술이다.아쉽게도 YS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 여전히 말을 아꼈다. 97년초의 환율논쟁이 빠져 있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이 97년초에 원ㆍ달러 환율을 1,000원수준(당시 700~800원)으로 올리는 원화평가절하조치를 취하기만 했어도 환란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원화평가절하를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강력히 건의했었다. 그러나 KDI의 건의는 묵살되고 말았다.
YS는 환율문제를 보고 받지 않았는가, 아니면 보고받았는데도 회고록에 넣지 않았는가. 또 경제정책의 핵심참모였던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
YS는 93년 3월3일 과천청사에서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3월3일을 아라비아숫자로 풀어쓰면 '0303(영삼영삼)'으로 YS를 상징한다.
경제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 부각을 위한 행사였다. 당시 이경식(李經植) 경제부총리는 이 행사 하루 전에 가진 경제기획원 조회에서 "김 대통령이 취임후 최초의 외부행사를 외교 안보 국방 치안 등을 제치고 과천청사에사 갖기로 한 것을 유념해 달라"며 "이는 김 대통령이 경제정책에 최대 역점을 두겠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경제대통령으로서의 YS와 환란 최고책임자로서의 YS가 회고록 곳곳에서 교차하고 있다.
이백만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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