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거성(巨星)이 졌다.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정주영(鄭周永)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오늘날 한국경제를 이룬 대표적 경제거인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는 건설, 중공업, 자동차, 전자등 중화학공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워내 국가기간산업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건설과 자동차 전자등 분야에서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서왔다.
고인은 구 소련과 중국등을 방문하며 경제교류에서 수교로 이어지는 북방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간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또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한 '체육인'이자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의료 학문 문화 복지등 다방면에 지원해 온 '사회사업가'였다.
특히 그는 98년 6월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남북긴장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드라마를 펼친 이래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키는등 남북 민간경협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자임해왔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학교(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대를 이어 농사일 맡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과 달리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가출을 했다가 번번이 부친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9세 때 4번째 가출에 성공한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해 봉급을 모아 38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 쌀가게인 '경일상회'를 시작했다.
40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써비스를 창업했다가 46년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로 확대했다. 47년에는 현대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진출했으나 6?5전쟁으로 자동차수리업과 건설업의 사업 기반이 와해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전후 복구 건설사업에 주력한 그는 57년 최대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맡아 일약 대형건설업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62년 단양시멘트공장으로 시멘트제조업에 뛰어든데 이어 65년에는 태국의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공사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공사에 진출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다. 68년에는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포드의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면서 자동차산업에도 진출했다.
세계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72년 현대중공업을 창업하면서. 당시 국내에 대형선박 건조경험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그는 현대중공업 공장을 건설하는 동시에 26만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했다. 2년 3개월만에 조선소 건설에서부터 배를 건조하는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76년에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고유모델인 '포니'를 수출하기 시작, '코리아 카'시대를 열었다. 자동차 해외진출 30여년만인 오늘날 현대의 승용차는 세계 190여개국에 연간 140만대 이상(기아 포함) 수출되고 있다.
그는 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해 중공업-건설-자동차-전자를 주력으로 하는 중화학그룹의 기틀을 완성했다. 현대전자는 창업 15년만인 98년 매출이 4조4,000억원에 달했으며 이중 3조5,000억원 규모가 해외수출에 의한 것이다.
고인의 이름에는 '회장'직책과 함께 '한국 최고의 갑부''재벌총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막상 본인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검소한 생활로 일관했다.
그는 사업이 상당한 기반에 올라선 이후까지도 구두값을 아끼기 위해 구두밑에 쇠징을 박고 다녔다. 70년대초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입던 바지를 보관했다가 늘어난 몸집만큼 허리 단을 다시 늘려 80년대중반 서산농장 간척 때 입었다. '배도 안 부른 담배를 뭐하러 피느냐'며 본인 스스로 담배를 손에 대지 않았음은 물론 직원들에게까지 금연을 권장하기도 했다.
그가 타계하기까지 거주했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의 거실은 20년된 낡은 소파와 탁자, 10년된 17인치 TV가 전부다. 한 때 '재벌총수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고인의 집에 도둑이 침입했다가 부인에게 화를 내고 달아났다는 일화도 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사용해야 할 곳에만 써야 한다. 내 스스로 갑부라는 것을 평소 생활에서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그저 좀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던 고인. 그는 후세에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도전정신과 근검정신을 남기고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정주영 고 현대 명예회장 약력
1915년 11월 강원 통천군 아산리에서 출생
1930년 송전소학교 졸업
1933년 가출
1940년 아도써비스 설립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년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
1965년 한국 최초 해외건설공사 진출
1967년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1969년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3년 현대중공업 설립
1976년 한국최초 고유모델 '포니'생산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87년까지)
영국여왕 대영제국 코맨더훈장 받음
1981년 88서울올림픽 추진위원장, 올림픽유치 성공
1982년 대한체육회 회장
1983년 현대전자산업 설립
1985년 룩셈부르크 월계관장 받음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1988년 대통령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음
1988년 현대석유화학 설립
1989년 한-소련 경제협회 회장
[학위]
명예 공학박사(경희대, 75년) 명예 경제학박사(충남대, 76년) 명예 경영학박사(미국 조지워싱턴대, 82년) 명예 경제학박사(연세대, 85년) 명예 문학박사(이화여대, 86년) 명예 정치학박사(서강대, 90년) 명예 철학박사(고려대, 95년) 명예 인문학박사(미국 존스홉킨스대, 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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