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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25년전 한일 올스타 3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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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 25년전 한일 올스타 3차전…

입력
2001.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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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봄이 오고 야구의 계절이 왔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야구를 시작해 선수, 감독, 해설가를 거치면서 수많은 경기와 사건 속에 묻혀 살아왔지만 그래도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만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그것은 내가 실력이나 체력의 한계 때문에 은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메이저리그 캠프를 찾았을 때 최희섭같은 후배들에게 "선수로 뛰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선수생활을 하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 마음껏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만큼 크기 마련이다.

나는 기량이 한창 무르익을 스물 여섯의 나이에 부상으로 야구를 접어야 했다. 1976년 7월말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한렝?올스타전 3차전이 열린 대전구장.

왠 일인지 미친 듯이 잘 쳤던 서울에서의 2차전을 마친 날 밤부터 시작해 경기 당일 새벽 3시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운명이 갈리는 순간은 정말 어이없이 찾아왔다.

신체검사 관계로 5일간이나 연습을 못했기 때문에 감독에게 "몸이 좋지 않으니 좀 빼달라"고 했다. 그러나 "네가 제일 잘 치고 있으니 한 타석만 더 나가도록 해라"는 말을 듣고 수비를 하러 나간 후 운명의 사고가 난 것이다.

멍한 상태에서 일본 선수의 슬라이딩에 왼쪽 다리 정강이 뼈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때의 고통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응급 처방이 불가능했던 시절, 다친 선수들을 위한 시설이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야전용 들것에 실려 운동장을 빠져 나올 때 모든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앰뷸런스로 대전서 서울로 후송되는 동안 강병철선배(현 SK 감독)가 "야, 빡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을 때 네가 강골이라 일본 놈이 부러진 줄 알았다"고 위로의 농담을 건넸지만 워낙 심한 통증 탓에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 네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재기에 몸부림쳤으나 성과가 없었다. 고민 끝에 그동안 야구로 인해 못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책과 씨름한 끝에 법대 대학원에 진학, 법대 학장으로부터 직접 논문심사를 통과받고 2년간 대학 강의를 위한 공부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날, 야구해설을 맡아 달라는 MBC의 요청을 받고 가볍게 응한 게 직업이 돼 버렸다. 요즘도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김재박, 이광은, 천보성 감독 등이 "형,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오랫동안 야구했을 거야.

그러면 지금쯤 코치, 감독으로 우리와 씨름하고 있을 텐데"라고 한 것처럼 25년전의 사건은 인생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고 말았다.

허구연·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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