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야말로 세상이 변하더라도 살아가는 활기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생생한 현장이다. 억척스런 장바닥 사람들의 삶, 그들의 웃음과 울음에 한 시대의 애환은 피고 또 스러진다."영등포시장이 바로 내 고향"이라는 소설가 이명랑(28)씨. 그가 "내 몸에 밴 시장 사람들의 냄새, 투박함을,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가난의 찌꺼기를 모두, 온전히" 기록했다.
그의 에세이 '행복한 과일 가게'(샘터 발행)는 지금 영등포시장에서 피어나고 있는 우리 삶의 열정과 애환에 대한 생생하고도 신나는 보고서다.
'낮에는 과일 장수, 밤에는 소설가.' 이씨는 특이하다면 특이한 경력의 작가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농협 영등포공판장 297호에서 과일 장사를 한다. 97년 무크 '새로운'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98년에는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행복한 과일 가게'에는 '문학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여자'인 자신이 '과일밖에 모르는 남자'인 과일 경매사와 결혼하게 된 사연, 과일 장사를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시장의 이야기가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기록돼있다.
9개월 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돼 화제를 모은 이야기들과 이씨가 새로 쓴 글을 모았다. 진상 손님(물건은 안사면서 이것저것 따지고는 그냥 가는 손님) 베스트5 목록에다, 실직해 술에 절어지내다 지금은 시장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과일 장사꾼이 된 전직 기술자 최서방 이야기, 요즘도 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루비'에 대한 장사꾼 아줌마 아저씨들의 사랑 등.
"어머니가 식당 해서 기껏 대학원까지 공부시켜 놨더니 겨우 과일장사냐"고 혀를 차는 이웃의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이씨는 이제 공판장에서도 손꼽히는 수완 좋은 장사꾼이다.
"어렸을 때 내가 향유하고자 했던 것들, 청결한 실내, 푹신한 등받이가 있는 소파, 그곳에서 음미하는 은은한 커피향 같은 것들을 나는 누리지 못했다.
가난이라고 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나의 가족은 괴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괴물이 되어버린 쪽은 나였다. 처음부터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은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헛된 욕망과 허영이었던 것이다."
욕망과 허영을 벗어던진 과일장수 소설가 이씨의 모습은 그의 젊음 만큼이나 아름답다. 이씨는 가출해서 시장에 흘러들어온 청소년 세 명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건달 창녀 등 시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작 등 두 편의 장편도 곧 출판할 예정이다. 영등포시장의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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