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과 거리 먼 '착한 글쓰기' 우리의 성난얼굴 만져주듯이혜경이 돌아왔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일식'('문학동네' 2001년 봄호)과 '대낮에'('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 인도네시아로 봉사활동을 떠난 지 꼭 3년 만의 일이다.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낯선 언어 속에 감금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모국어가 자유롭게 요동칠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다.
사실 이혜경은 눈에 띄는 작가는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말은 그녀의 소설이 의미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장편 '길 위의 집'이나 소설집 '그 집 앞'에 드러나듯 한 개인의 가슴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조탁, 위무하는 그녀의 감각은 동세대의 어느 누구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은 유행과 시류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녀의 염결성, 과작에 가까울 정도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장인정신, 겪지 않고 느끼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아마추어리즘 등 그녀의 글쓰기 습벽이 허풍이나 뻥과는 거리가 먼 고지식한 행로를 자청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바란다.
이번 소설들에서도 그녀의 이러한 성격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천하의 인간 말종인 시아버지를 모시지 않는 죄책감('대낮에')이나 사랑의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삶의 어쩔 수 없음('일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소설들은 이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도덕을 건드리는 간절함을 지니고는 있으되, 그 자체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내면을 뼈아프게 되돌아보고('대낮에') 우리 삶의 속절없음을 조용히 관조('일식')할 뿐이다.
갑자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아버지가 나타난다.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조차 지니지 못한 이 '인간'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영원히 자신의 기억에서 제거해야 하는가.
'대낮에'가 제기하는 이 질문은 사실 가장 '박완서'다운 테마라고 할 만하다.
박완서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박완서는 인간의 도덕률 저편의 생생한 욕망, 이른바 인륜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혜경은 죄책감을 테마로 선택했다.
이 점은 '일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이 머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사랑에 몸을 던진다면 '전경린'이다.
가족과 함께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유부남 애인의 이중성을 통찰한다면 '은희경'이다.
사랑의 환희와 상처를 내면의 무늬로 아로새긴다면 '신경숙'이다. 그러나 이혜경은 다만 눈물의 위로를 말할 뿐이다.
'마음의 간절함도, 지나고 나면 헛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사랑의 기억을 차곡차곡 접어두는 쪽을 택했다.
어떤가? 여기에 이혜경의 개성과 한계가 동시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 어느 쪽을 택하든 모든 것은 작가의 몫이며 그것들 사이의 우열은 없다.
그러나 조금 더 독했으면 싶은 대목도 없지 않다. 뭔가 조금 더 나갔으면 싶은 대목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바로 잘못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녀의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여운과 마음의 밑자리를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그녀의 정감어린 말투, 착하디 착한 마음 씀씀이가 불현듯 우리의 성난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바로 그것이 이혜경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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