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장 결선투표에서 사회당(PS)의 베르트랑 들라노에 후보가 우파 공화국 연합(RPR)의 필립 세갱후보를 누르고 최초의 좌파 파리시장에 당선된 것은 우파의 분열과 변화를 요구하는 파리시민들의 정서에 힘입은 바 크다.파리시장 자리는 1977년 선거제로 전환된 이후 24년간 우파가 장악해 온 난공불락의 아성이었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따른 우파 진영의 고질적인 부패와 잇단 정치 스캔들은 파리시민들에게 극도의 정치적 불신과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좌파후보의 당선가능성이 점쳐지는데도 우파진영은 결선투표 직전까지 후보 단일화 조차 이뤄내지 못하는 심각한 분열양상을 보였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후임으로 임명된 장 티베리 시장은 유령 선거인명부 작성 사건과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돼 소속정당에서 제명되자 무소속 출마를 강행해 우파 표를 잠식했다.
과거 우파가 독차지했던 파리의 20개 구는 98년 선거에서 6개가 좌파로 넘어간 데 이어 이번 선거에서는 절반이 넘는 12개 구를 좌파가 차지했다. 파리시민들의 우파에 대한 염증과 '바꿔'열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랑스 정치에서 파리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순한 지방자치 단체장의 수준을 뛰어 넘을 정도로 크다. 시라크 대통령이 18년 동안 파리시장으로 재직하며 닦은 정치적 기반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리시장은 대권을 향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정치적 비중이 큰 인사들이 파리시장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대권 레이스를 향한 장기적인 포석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직원수만 4만4,000명, 50억 유로의 예산을 집행하는 파리시청은 특히 선거철에 직 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같은 파리시청이 좌파의 손으로 넘어감에 따라 차기 대선을 향한 좌파진영의 행보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대선에 출마할 리오넬 조스팽 총리에게는 좌파의 파리시청 접수가 큰 힘이 되겠지만 파리시장 출신으로 재선을 노리는 시라크 대통령은 대선가도에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의 전국적인 득표에서는 우파가 앞서 파리시와 제3의 도시 리옹시를 제외한 마르세유와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루앙 오를레앙등의 대도시에서는 우파후보가 시장자리를 차지했다.
지방선거에 출마한 리오넬 조스팽 정부의 여성 각료 중 마르틴 오브리 전 노동부장관은 릴 시장으로 당선됐지만 아비뇽 시장에 도전했던 엘리자베스 기구 노동부장관은 낙선, 명암이 갈렸다.
파리=이창민특파원
cmlee@hk.co.kr
■베르트랑 들라노에 누구
베르트랑 들라노에 (50)는 공개적으로 동성연애자임을 선언한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1999년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동성연애자임을 인정한 후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총리 등 사회당 의원들의 지지와 격려, 지식인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오히려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파리시장을 노리던 최대의 라이벌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이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함에 따라 지난 해 3월 비교적 손쉽게 사회당 파리시장 후보로 지명된 들라노에는 각종 여론조사마다 50% 안팎의 지지를 얻었다. 주차비 인하와 파리시의 골치거리인 개똥 청소를 약속하고 젊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며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소를 증설하겠다는 공약이 적중한 것이다.
그는 시장이 되면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 보다 미래를 준비하겠다고 선언하고 파리시의 투명한 예산 집행을 위해 독립적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 새로운 시 운영의 모델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전기자동차 개발 지원과 배기가스 배출의 획기적 개선 등 환경 친화적인 정책을 실천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들라노에는 1972년 사회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고 81년 파리 18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됐다. 사회당 대변인과 당 제 1서기 등의 엘리트 정치 경력을 쌓고도 정치에 회의를 느껴 한때 정계 은퇴를 선언한 적도 있다. 그러나 8년여의 정치 공백을 딛고 93년 정치에 복귀, 95년 조스팽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해 신임을 얻었고 이어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파리=이창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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