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라는 말에 무슨 뜻이 숨어있는지 아시오?"'한국의 위대한 사상가'로 새롭게 추앙받고 있는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謨ㆍ 1890~1981)의 제자인 김흥호(金興浩ㆍ82) 전 이화여대 교수는 다석의 가르침과 사상을 '쉽고 짧게'설명해달라고 계속 조르는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는 다석의 삶을 배워 48년째 하루 한끼만을 먹고 있으며, 30년째 같은 곳에서 매주 일요일 강의를 하고 있다. 다석도 39년간 하루 한끼만을 먹었으며 50년 가까이 한 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많은 제자를 거두었다.
"다석 선생은 꼭대기라는 말은 '꼭'이라는 말과 손을 대본다는 '대기'가 합한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손을 꼭 대봐야 하는 곳, 그 곳이 꼭대기이며, 꼭대기는 결국 진리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하셨소." 이렇게 말한 그는 기자가 대강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깨끗'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 것 같으냐고 또 물었다.
'글쎄요'만 되풀이하자 그는 '깨'는 '깨우침'이며 '끗'은 '끝'이라고 말했다. "진짜 깨끗한 건 진리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죄악세상을 끝내야 한다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신 거지"라는 말이 뒤따랐다.
그는 다석을 해방 후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공산정권을 피해 고향인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와 춘원을 만났더니 무엇을 배우더라도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譜)나 다석에게서 배워라.
한국에서는 그 두 사람 이상 가는 분들이 없다고 하시더군."다석은 그 때 YMCA에서는 한 달에 두 번 금요일 대중 강의를 하면서 북한산 밑 자신의 집이나 제자들의 집에서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가 춘원의 말을 듣고 다석을 만난 직후 씨알 함석헌(咸錫憲ㆍ1901~1989)도 북한감옥에 갇혀있다 내려와 다석의 강의에 합류했다.
함석헌은 다석보다 열한살 아래이지만 생일이 같아 지난 13일에는 다석 탄신 113주년, 함석헌 탄신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었다.
그가 기자에게 '꼭대기'와 '깨끗'을 통해 다석사상의 독특함과 새로움을 설명하게 된 건 "다석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분이 선생님께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셨습니까? 함석헌 선생은 그 분에게서 무엇을 배웠길래 그런 삶을 사셨습니까?"라는 거듭된 질문을 받고서였다.
"성경 불경 공자 맹자 노자‥, 모든 걸 가르쳤지. 모든 게 들을 만했지. 언제나 한 백명이 모여 듣는데, 뭐랄까, 나는 그 분이 가르치신 게 애국심이라고 생각해요."
"다석은 모든 걸 그렇게 가르쳤소. 동서양 고전을 두루 가르치면서 우리 것을 우리 식으로 일깨우려고 노력한 것이오. 누가 말했듯 다석은 우리 말에 우리 사상을 집어넣어 '철학'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최초의 사상가입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열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이런 우리말 숫자에도 다석은 새롭게 풀이했소"라고 말하고는 "열렸음을 서러워마라, 쉬어 이어쉬어 이루리라"고 읊조렸다.
그의 읊조림을 다시 적어보면 '열(10)려 스물(20)을 서러(30)마라, 쉬어(50) 이어쉬어(60ㆍ계속해서)이루(70)리다'다.
그에 따르면 다석은 이 말로 '태어남을 서러워 하지 마라, 말을 쉬고 진리를 계속해 생각하다 보면 이루게 된다'고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48년째 하루 한 끼만을 먹어오면서 30년째 매주 일요일이면 이화여대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석처럼 동서양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하루는 다석 선생하고 함석헌 선생하고 백운대를 올라갔소. 다석 선생은 이미 7년째 하루에 저녁 한끼만 드시고 있을 땐데 우리보다 훨씬 빨리 오르시고, 훨씬 빨리 내려 오더란 말이오.
그 전날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다녀오신 분이 피곤한 기색도 없이 우리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요.
더구나 우리는 그날 아침을 먹었지만 다석 선생은 전 날 저녁을 드신 것이 전부인데 말이오. 함 선생은 그 길로 일일일식에 들어갔는데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6년 뒤에야 시작해 여태 한 끼만 먹고 있소." 백운대에 올랐을 때 다석은 쉰 아홉이었고 그는 스물아홉이었다.
_다석선생이 하루 한끼만 드신 이유는 뭔가요?
"간디의 영향 때문이오. 비폭력ㆍ무저항주의 등 간디의 사상을 좋아했던 선생은 간디의 사상만 따를 것이 아니라 삶도 닮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일일일식을 시작했다고 해요.
그분이 호를 다석이라고 지은 것도 그런 뜻이지. 多夕은 저녁 夕자가 세개 아니오.
저녁 한 번으로 하루 세끼를 다 먹는다는 뜻이 들어있는 거요."
_그런데 하루 한끼만으로 건강이 유지됩니까?
"첫 일년이 힘들었소. 기력이 떨어져 이화대학 정문에서 큰 길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데 열 두번은 쉬어야 했소. 그러나 일년이 지나니까 견딜 만 합디다.
여태 감기는 몇 번 걸렸지만 앓아서 누운 적은 없소.교수 노릇을 오래 하면서도 결근 한 번 안 했다오." 180㎝가 넘는 그는 백발과 얼굴의 주름만 아니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허리가 꼿꼿하고 목소리가 또렷하다.
그제서야 다석의 강의 분위기가 짐작이 되었다. 다석은 1928년에 YMCA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민족의 앞날이 어둡기만 했던 그 시절,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상과 독특한 가르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좁은 강의실에는 열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가르치려는 정열과 배우려는 욕구가 넘쳐 났을 것이다. "다석 선생은 웅변가는 아니었소. 거짓이라고는 평생 몰랐으니 아는 것을 가지고 대중을 휘어잡으려는 쇼맨십도 없었소.
한 사람 한 사람과 가슴을 열어놓고 통하시는 분이었지. 그래도 분위기는 뜨거웠소.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
함석헌 선생이 그랬잖소. 다석이 없었더라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고. 그 때 함께 배운 사람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소.
나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만난 다석을 그는 평생 흠모하며 살아왔다. 다석은 YMCA에서의 대중강연 외에 서울 북한산 자락 구기동 자신의 집이나 제자의 집에서도 뜻 맞는 제자들을 모아 자신의 생각을 알려왔다.
그도 빠지지 않았다. "하루는 다석이 강의를 하는데 아무도 안 나온 날이 있었소. 그래서 함석헌 선생하고 내가 약속을 했지.
다석의 강의에 아무도 안 나오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만약 못 나오는 날이면 함 선생이 나오고, 함 선생이
못 나오면 내가 자리를 지킵시다고 말이오."
_다석이 지금도 계신다면 어떻게 살고 계실까요?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분이니 여전히 YMCA나 집에서 강의만 하셨을 거요.
하지만 그 분의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전파하고 있겠지. 그게 우리의 힘이 되고 있겠지." 더 이상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스승에 대해 이런 저런 가정법으로 계속 우문(愚問)만 해대는 기자가 답답했던 것 같았다.
_함석헌 선생은 박정희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에 행동으로 항거했는데 다석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건가요?
"다석의 제자 중에는 함선생처럼 박정권에 행동으로 항거한 사람도 있지만 참여하면서 스승의 뜻을 전하려는 사람도 있었소. 스승께서는 어느 게 옳다, 그르다고 하시지 않았소.
애국하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게지."
_김 선생님께서 이화여대 주일학교에서 30년째 강의를 하시는 것도 다석의 영향때문입니까?
"다석이 45년간 강의를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그래서 주일학교 강의를 시작한 거요. 이제 30년 됐는데 죽을 때까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오."
그는 주일학교에서 다석처럼 성경 불경 동양고전 모두를 강의해오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건 다석이 이미 말했던 것이오.
다석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표정도 그때처럼 진지한 걸 보니 헛된 것 같지는 않아."
그는 얼마 전 출판사 솔을 통해 다석의 육필원고를 풀어 쓴 일곱 권짜리 '다석일지(多夕日誌) 공부'를 출간했다. "이게 다석선생 사상의 총화인데, 더 늦으면 아무도 풀어낼 것 같지 않아 내가 책을 냈어요. 그런데 책값이 비싸서 다 팔릴 것 같지 않아.
내기 어려운 책을 출판해준 출판사가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어디 대학 도서관 같은 곳은 꼭 이 책은 꼭 비치해야 한다고 써줄 수 있겠소?"스승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더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했다.
기자는 이 글로 다석 사상을 알리려 한 것이 아니다. 다석과 그의 제자들이 오랜 세월 갈고 닦아놓은 사유체계를 두어 시간의 만남을 통해 전하겠다는 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일 것이다.
다만 그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 당시에도 우리 것을 찾아 바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썼다.
●김흥호가 살아온길
평양이 고향인 그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해방직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권유로 고향 부근에 용강중학교를 설립한 그는 공산정권의 압박이 심해지자 남한으로 내려와 잠시 공무원 생활을 했다.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위당에게서는 양명학을, 다석에게서는 성리학을 배우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그의 지식은 더욱 폭 넓고 깊어졌다.
위당이 양주동 이숭녕 등과 국학대학을 세우자 그는 이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는다. 국대안 파동으로 이 대학의 운영이 좌익계로 넘어가자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다석의 강의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 무렵 북한에서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열아홉살 손위인 함석헌을 처음 만난다.
수복 후 그는 위당의 주선으로 백낙준이 총장으로 있던 연세대에서 동양철학 강의를 맡아 5년간 학생을 가르치다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의 요청을 받아 이대에서도 철학개론을 강의했다.
이대에 나가던 어느날 김활란은 그에게 '교목'이 필요하니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해오면 좋겠다고 부탁, 미국서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목사 안수까지 받고 돌아와 교목으로 있으면서 종교철학 기독교문학 등을 가르쳤다.
28년을 봉직한 이대에서 물러난 그는 요즘에는 감리교신학대학에 1주일에 한 시간 주역, 양명학, 선불교 등에 대해 강의하면서 뜻 맞는 교수들과 추사체 등 서예공부도 하고 있다.
그가 동양고전의 깊이를 말하기에 요즘 TV의 동양고전 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으나 이내 그 질문을 한 것도 후회하게 되었다.
어쩌다가 그 프로그램을 딱 두 번 보았지만 논어가 없는 논어 강의에 너무나 실망해서 더 이상 보지 않았다는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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