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 소피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피스트는 보통 궤변론자로 번역된다. 그런데 소피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번역은 다소 억울할 것이다.왜냐하면 소피스트는 궤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재판에서 이기는 논법을 가르치는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는 시민 사회로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던 시대였다.
시민은 누구나 고소할 수 있었고 고소를 하면 재판은 열려야 했다. 사소한 문제도 있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심각한 사안도 있었기 때문에 재판정에서 말을 잘 못하면 재산의 손실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각자 자신을 지킬 '말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수요가 있으므로 당연히 돈을 받고 승소하는 논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학원의 선생들이 소피스트였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중 한 사람이었는데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승소하는 화술은 가르치지 않고 본질을 탐구하였다.
즉 정의(正義)가 무엇인가를 따졌지 실제 재판에서 쓸만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연히 돈도 받지 못했다.
실생활에 쓸모가 없는 것에 누가 돈을 주겠는가?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바가지를 긁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현대가 다시금 거대한 소피스트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각종 토론회를 보면 분명히 저 사람이 옳은 것 같은데 '말발'이 달려 토론에서 밀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토론에서 일단 밀리면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토론에서 일단 주도권을 잡아 이길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판도 마찬가지이다.
피고의 유무죄 여부보다는 승소 여부가 변호사, 검사에게 더 중요하다. 어쨌든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 선이다.
유능한 변호사는 아무리 불리한 재판에서도 승리하는 변호사이다. 더 이상 우리 사회는 올바른 검사나 변호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승소하는 것이니까.
지금 우리 시대에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필요 없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돈이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데에 돈을 쓸 까닭이 있을 리 없다.
철학자가 실제로 무슨 도움이 된다고 철학자에게 돈을 투입하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논리 정연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없다면 돈을 들여 대리인을 사면된다. 그런데 대리인으로 소크라테스를 택하겠는가? 당연히 소피스트를 택할 것이다.
민주사회는 역사적으로 거의 언제나 소피스트의 시대였다. 암울한 독재 시대나 가혹한 시련기에 사람들은 정의나 인권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정의의 씨앗이 마른 시대에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고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주 시대에 인간은 어떤 의미로는 느슨하다.
거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 같기 때문에 경제 문제 외에는 고뇌하지 않는다.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이 문제이다.
그리고 민주사회이므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법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법이 정의를 지켜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법은 규약 이상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정해진 법안에서 어떤 것이든 허용된다.
그러므로 유능한 소피스트를 동원해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된다. 절세와 탈세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유능한 소피스트가 하는 것이 절세이고 어설픈 소피스트가 하는 것이 탈세이며 순박한 소크라테스가 하는 것이 납세이다. 거대한 소피스트의 시대에 소크라테스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탁석산ㆍ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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