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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 회고록, 생산성과 소모성

입력
200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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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와 상관없이 백악관을 떠나야 했을 때, 내 나이 겨우 쉰여섯이었다.'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람들이 나의 부끄러운 패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실직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우리 땅콩농장이 100만 달러 이상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것이다. 사회는 이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완전히 다른 일에 헌신해 보자. 더 어렸을 때도 시도했는데 지금이라고 왜 안 되겠는가?' 라고 결심한다.

'다른 일' 중의 하나가 국제해비타트 운동이다. 무주택 서민에게 집을 지어주는 자원봉사 사업인데, 카터씨는 오는 8월 충남 아산시의 집짓기 사업에 참여해서 땀을 흘릴 예정이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의 귀환 장면은 막막하던 카터씨와 비교할 때 퍽 행복해 보인다.

'상도동에 도착하니 주민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다. 낯익은 이웃이 진심어린 격려로 나를 맞아 주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래 45년 동안,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이제 상도동 주민 여러분과 저는 5년만에 다시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회고록에서 돋보기를 대고 본 부분이 있다. YS의 대학 성적표 사진이 실렸는데 글씨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A 학점은 드물고, B보다도 C와 D가 더 많았다.

'나는 사실 좋은 학점은 받지 못했고, 아마 중간에서 바닥을 오가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는 구절을 읽고는 웃음이 나왔다. 이 대목이 솔직하게 느껴져 책에 대한 신뢰도까지 높여주는 듯했다.

저자는 대학 성적을 공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재임시 업적에 대해서는 대부분 후한 점수를 주면서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형평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이 회고록은 꽤 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과신에 찬 회고록이라도 어느 정도 과거 상황을 판단케 해주는 실마리가 들어 있으며, 또한 모처럼 밀실정치의 폐습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나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할 것"이라는 정치인들의 말처럼 무책임하고 회피적이며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도 없다. 밀실정치의 오랜 전통 속에, 판단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국민은 이런 말의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회고록이 국민의 정치감각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 회고록에서 부당하게 묘사되거나 폄하된 정치인들은 자신의 회고록을 씀으로써, 평가의 균형을 잡아가기 바란다.

특히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기다려진다. 우매함과 독선, 불의, 폭력, 억압의 분위기를 총동원하던 1980년대 대통령들의 글을 통해 지금이라도 당시의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YS는 최근 서예전도 열었다. 행서체인 그의 서예는 힘 있고 활달했으나, 절제되고 단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예하는 대통령 세대'도 머지 않았을 것 같아 전시회가 의미 있게 여겨졌다. 다만 회고록과 서예전에서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는 생산적이지만 소모적 요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출품작 중 '勝利(승리)' '自由(자유)' '無愧(무괴, 부끄러움이 없다)' '君臣有義(군신유의)'등 아직도 투쟁적이거나 부적절해 보이는 글이 서글프게 했다.

노년에 이르러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회고록을 쓰고 서예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회고록과 서예전이 보다 더 내면을 성찰하고 인생을 관조하는 글들로 채워진다면, 더 아름답고 생산적이 될 것이다.

박래부 편집국 부국장 겸 문화부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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