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12일 미국의 은행업계는 소리없는 환호성을 터뜨렸다. 클린턴 대통령이 약 60여년 동안 은행겸업을 금지해왔던 글래스 스티걸 법의 일부 조항을 폐지하고 새로이 금융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그램_리치_블라일리 법에 서명했기 때문이었다.증권업이나 보험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것은 지난 60여년 동안 미국 은행업계의 숙원사업이었다. 허용된 금융업의 범위를 놓고 치열한 법정공방이 있어 왔고, 금융지주회사 형태로 여타 금융업에의 진출을 허용한 이 법 역시 약 10여년 간에 걸친 집요한 의회로비의 산물이었다.
사정이 그러하길래 은행업계를 대표하는 로비단체인 전미은행협회는 즉각 환영논평을 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시 작년 가을 언젠가에 금융지주회사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며칠전에는 최초의 금융지주회사가 될 '우리금융지주주식회사'의 창립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환호도 기대도 없었다. 은행업을 향한 부러움과 시기어린 시선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물가에 아이를 두고 온 엄마의 심정같은 근심만이 보일 뿐이었다. 왜 그럴까.
우선 우리 은행에게 겸업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겸업의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모색해 왔던 미국의 은행들과 달리 우리 나라의 은행은 은행업 본연의 업무를 잘 하기에도 벅차다.
타 금융업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하기는커녕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자회사마저 수익구조의 개선을 위해 처분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입장에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겸업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주어도 당사자의 반응이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금융지주회사를 보는 시선에 우려와 근심이 가득 담겨 있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제도의 실제 진행상황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짐작이 간다.
미국의 금융지주회사는 법이 바뀌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회사로 편입되어 있거나 혹은 자회사로 편입될 은행이 자본의 충실도나 경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우수한 경우에 한해 금융지주회사가 허용되는 것이다.
즉 우등생에 대한 일종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우등생이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그 특권이 박탈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범하는 '우리' 지주회사는 누가 보더라도 우등생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가장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한빛은행은 지주회사가 실질적으로 출범하는 축복받은 바로 그날에 작년도 영업손실이 3조원을 상회한다는 성적표를 발표하였다.
물론 공적 자금 투입이라는 도깨비 방망이에 의해 수치상으로야 다시 우량은행이 되겠지만 우등생에 대한 선물이라는 의미는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예금보험공사에서 나온 직원 1명만 있으면 자회사와 지주회사의 모든 주주총회를 적법하게 개최할 수 있는 현실이 웃기지 않는 코미디를 연상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미 시작된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차라리 출생의 아픈 기억을 하루 빨리 접고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지 모른다.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회사로 편입되는 은행의 부실을 하루빨리 털어내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손자회사도 매각하고 합병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이 출생의 아픔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다. 겸업진출은 이런 작업이 잘 종료된 다음에나 검토할 문제다.
만에 하나 이번에 선임된 경영진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월만 허송하거나, 섣부르게 타업종으로 덩치를 확대해 '대마불사'의 신화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디 예금보험공사 직원이 과연 주주의 역할을 잘 수행할지 한 번 지켜보기로 하자.
전성인ㆍ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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