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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겐셔리즘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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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겐셔리즘을 배우자

입력
2001.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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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디트리히 겐셔 전 독일 외무부 장관. 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와 함께 독일 통일의 주역인 그는 외무부 장관직을 무려 18년(1974-1992) 동안 역임했다.그는 구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부 장관(29년)에 이어 지난 세기에서 각국 외무부 장관들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1995년에 출간한 '회고'라는 제목의 자서전은 독일 현대외교사의 압권이라고 부를 정도의 사료적 가치가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재임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을 달성하려는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동서독 통일은 미국과 소련 등 주변 4강의 이해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건이었다.

소련은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미국은 당연히 나토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겐셔는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부 장관과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을 오가며 통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하되 구 동독 지역에는 나토군을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후 1990년 9월 이른바 '2+4'협정을 마무리 지으면서 통일에 따른 주변국들의 외교적 마찰을 없애고 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미소간의 냉전시대에 국익과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한 그는 특유의 소신과 실리 외교를 구사하는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의 외교철학을 두고 '겐셔리즘'이라는 외교 용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겐셔리즘이란 외교 정책과 역사의 흐름을 하나의 발전과정으로 파악하면서 패권과 영향력 행사 지역으로 세계를 분할하는 것을 막고 다극화 체제 속에서 공존하자는 것을 말한다. 겐셔는 미국을 잘 알면서도 치우치지 않았고 소련을 적대시 하지 않으면서 포용했다.

남북한은 물론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주변 4강은 한반도에서 서로 뒤엉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외교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심중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뛰어난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을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추진하는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듯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부시의 대북한 강경정책은 이미 후보 시절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과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등은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사전 조율차 미국을 방문했었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도록 과연 무엇을 했을까.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ㆍ안보팀과 제대로 정상회담 준비를 했을까. 대미 외교는 그렇다 치고 러시아는 미국에 '실수'를 인정한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결국 우리는 미국과 러시아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 셈이다.

현재 한반도 정세를 불 때 우리는 주변 4강과 남북한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통일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우리에게 겐셔 같은 인물은 없을까.

이장훈 국제부차장

truth2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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