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미 제2사단 야포부대(당시 필자는 측량원으로 종군)에서 휴가를 받아 찾아갔건만 아버님은 안 계셨다. 이미 두 주일전 세상을 떠나 불귀의 객이 되셨다는 것이다.폐렴으로 말이다. 장소는 온양에 임시로 마련된 피난민수용소. 6ㆍ25 전쟁이 아직 한창이던 1951년 4월 하순 어느날이다.
아버님과 친히 지내셨다는 그 노인은 그렇게 전해주시면서 "이것이 아버님이 남기신 전부일세"라며 사진 한장을 건네주었다.
1ㆍ4 후퇴 직전 연합군 전선이 괴멸되면서 후퇴하기 직전 잠깐 서울에 들러 아버님을 뵙고 헤어질 때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쥐고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묘소 앞에 엎드려서 말이다. 수용소 사람들이 묻어준 묘지에는 묘비는 물론 묘석 하나 없었다. 땅거미가 다가올 무렵에야 일어나 냇가에서 돌을 주워 묘지 앞에 구덩이를 파고 세워놓았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자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그 옛날 독립 운동으로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일도 있고 해서 해방후 광복군의 귀국과 더불어 동지들과 함께 이북으로 건너간 뒤 서울로 오셨고 나는 중국 베이징대학에 다니다가 해방 이듬해인 46년 6월에야 미군이 보내준 LST(상륙용함정)에 탑승, 인천을 경유해 서울로 왔다.
내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서울 도착 다음날. 장충단공원 일대에 나무건 벽이건 종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라면 남김없이 사람찾는 명단 종이를 붙였던 덕에 만날 수 있었다.
독립 운동가였고 옥살이까지 했건만 아버님께 남은 것은 가난과 빈털터리 신세뿐이었다. 해방이 됐어도 날뛰는 것은 친일파 뿐이었고 독립유공자를 돌보아줄 겨를은 없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우리 둘은 마포구 공덕동에 마련된 피난민수용소에서 미군이 준 야전용텐트에서 6ㆍ25가 일어날 때까지 4년간 가난의 구렁텅이 속에서 보냈다.
하지만 우리 부자는 행복했다.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풍요로웠으니 말이다. 나는 아버님의 독립운동 전력을 높게 평가했고 또 자랑으로 여겼으며 아버님은 서울대학을 다니는 아들의 가능성에 대해 크게 기대했다.
가난했던 나날, 그러나 서로 의지하며 믿고 사랑했던 그 날을 되새기면 터져나오는 울음 속에서도 표현할 수 조차 없는 행복감에 잠기기도 한다.
아버님은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서 어쩌면 이 아들의 성장을 크게 기뻐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김정흠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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