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할인(속칭 와리깡)의 메카'로 불리며 기업자금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울 명동 사채시장이 환란과 코스닥 벤처 거품 붕괴 이후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다.무엇보다 일본 자금들이 물밑듯이 들어와 기존 개인 대상 고리대금 시장의 존립기반을 급속히 위협하고 있다. 기존 전주들은 어음할인이나 채권 매입을 포기하고, 퇴장하거나 아예 대박의 꿈을 안고 프리코스닥 업체를 찾아 강남으로 둥지를 옮기고 있다.
그 자리를 저금리 시대 새로운 자금운용처를 찾고 있는 강남의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 부인, 자영업자들이 채우면서 세대교체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일본계 자금 공세
명동 중심가에 자리잡은 U빌딩 6층. 다닥다닥 붙은 3~4평 규모의 작은 사무실 사이로 영문 간판이 달린 은행 형태의 깔끔한 사무실이 눈길을 끈다. 이른바 일본계 대금(貸金)업체 사무실이다.
이들 사무실은 은행 창구 형태의 인테리어를 갖추고 신분증 하나만으로 200만~300만원 가량의 급전을 쉽게 공급하면서 세를 늘려가고 있다. 국민은행과 서울은행 본점 뒷편에 몰려있는 1평 규모 고리대금 업체의 '무보증 신용 대출'과 경쟁에 나선 것이다.
한 고리대금업자는 "일본 대금업체의 대출금리는 월 7% 수준으로 연간 80%가 넘는 고금리지만 단기간에 적은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계 대금업체 A사 김모(37)씨는 "경기침체를 겪고있는 일본에 사실상 제로금리가 지속되면서 일본계 전주들이 한국을 새로운 자금운용처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며 "일반 신용대출의 연60% 금리보다는 높지만 깔끔한 일처리와 체계적인 운영으로 점차 이용자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미래를 꿈꾸는 사채업자들
명동 사채시장의 변화 움직임은 전주층 교체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한 사채업자는 "1998년 말부터 장외주식시장과 코스닥시장에 투자해 수십배의 차익을 남긴 이들은 점차 본업으로 돌아왔지만 주식시장 급락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라며 "아예 돈이 되는 장외시장 투자를 위해 강남으로 옮긴 전주들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질금리 0%대의 저금리 시대가 찾아오면서 명동시장이 새로운 자금운용처로 다시금 주목받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사채시장에서 유능한 중개상을 잡으면 연 15% 이상의 고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여러 곳에서 '돈을 굴릴 수 있느냐'고 문의하는 전화가 늘어나고 있다." 명동에서 사채 사무실을 운영하는 안모(39)씨의 귀띔이다. 새로운 전주들로는 강남의 부유한 의사, 변호사 부인과 자영업자 등이 꼽힌다.
명동 인근의 종합금융사 관계자는 "어음 할인시장이 제도 금융권의 공세와 기업 경영 부실 심화로 침체를 면치 못하면서 전통적인 명동 사채시장의 틀이 무너졌다"며 "새로운 전주들의 등장은 명동 사채시장의 미래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과거 명동 사채시장이 수행했던 '실물경제의 축소판' '경기의 선행 지표' 역할은 사라진지 오래고 개인과 기업대상 자금시장 역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20년째 사채업을 해왔다는 한 업자는 "기업자금이 일부에게 몰리는 경향이 있고 주식시장 침체는 계속될 것으로 보여 아직도 보수적인 대출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반 고리대금업체 관계자도 "아무리 신용대출이라고는 해도 채무자가 제대로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인지를 여러가지로 평가하고 있다"며 "개인 신용대출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경기침체가 심하다는 이야기 아니냐"고 반문했다.
명동 사채시장의 봄은 새로운 변화의 바람과 함께 오고 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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