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정상회담으로 2000년은 한반도 문제가 세계정치의 최대 관심을 모았던 해였다.그 주역을 담당했던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고, 김 위원장도 새로운 인물로 국제무대에 부상하여 각광을 받았다.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한반도 문제를 한민족끼리 해결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처럼 믿고 모두들 흥분하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그 좋은 기간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계획에 대한 러시아, 중국의 강력한 반발과 부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북 화해ㆍ협력 정책에 대한 적지않은 이견 노출로 한때 충만했던 흥분과 기대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더욱 남북문제에 남북한이 주역을 하던 지난해 같은 시기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민족적 비애를 느낀다. 간단히 말해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자기들 이해관계로 남북관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여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민족에게 주어졌던 기회가 소멸될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관계의 중요성과 한국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 그리고 남북관계 해결의 주역은 김 대통령이 계속 담당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김 대통령 햇볕정책의 근간인 '북한변화론'에 깊은 회의를 분명히 표했고, 북한 변화에 대한 '검증' 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처럼 한미간 대북정책 이견이 분명히 천명된 것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 문제와 연결되어 한국의 대북 및 대미 관계, 그리고 4강 외교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매우 염려된다.
첫째 부시 대통령이 북한변화론에 회의와 검증을 강조한 것은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은 북한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 완전한 투명성 확보에 있음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에게는 남북관계 개선이 가장 중요하지만 미국에게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에 대한 완전 봉쇄가 세계 전략상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 점이 한미간의 근본적 차이다.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한반도에 조성된 평화 분위기에 밀려 '페리프로세스'와 남북협상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됐던 미국이 부시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남북한에 강력한 압력을 다시 가하고 있다.
둘째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될 NMD 계획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 중심의 '반 NMD 세력' 형성에 대한 미국의 경계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관계에 영향을 미칠 중요 현안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소련 몰락 이후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확립에 필요한 세계적 군사패권의 강화를 위해 NMD 계획을 적극 검토 중이다.
냉전시대 초(超)핵강대국 미ㆍ소는 요격미사일 수의 제한을 통해 상대국의 핵 공격에 완벽한 미사일 방위체제 구축을 금지하는 ABM 조약에 합의, 이른바 억지전략으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왔다. 이제 세계적 군사패권 장악으로 자신을 얻은 미국이 불안한 억지전략에 근거한 ABM 조약을 폐기하여 모든 핵 미사일 공격을 봉쇄, '안전한 평화'를 확보하려는 것이 NMD계획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NMD가 매우 바람직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NMD가 완성되면, 러시아와 중국의 핵 전력이 무력화하기 때문에 러ㆍ중의 반대도 당연하다.
NMD의 성공은 세계적 유일 패권국 미국의 지위가 요지부동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 북한, 베트남을 묶어 반NMD 세력을 구축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방한 길에 ABM 체제 유지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한 것이 한미간에 문제가 되었다.
중국이 최근 국방예산을 17% 증액하여 국방력 강화를 서두르고 있는 것도 미국의 NMD 강행 방침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NMD 문제는 벌써 한미관계 뿐 아니라 한국의 4강 외교에 적지 않은 시련과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오랜 한미동맹이 자동적으로 한국의 NMD 지지로 연결되기를 바랄 것이다. 한편 한국정부는 NMD 지지는 중국, 러시아, 북한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되어 햇볕정책에 대한 이들의 지원 상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 측면에서만 보면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보다 더 지지를 보내는 묘한 현상이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4강 외교가 2000년을 넘기자마자 시련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우리 한민족이 한반도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기회를 별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 정신을 차려야겠다. 2000년에 한민족이 주역이 되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이호재 고려대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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