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수 서태지가 귀국했을 때 입었던 구찌 니트 셔츠를 가장 먼저 판 곳은 어디일까? 구찌 매장이 아니다. 바로 동대문 카피(모조품)시장이었다. 구찌 한국 지사가 본사에 구매 주문을 내고 우송을 기다리는 사이 재래시장은 벌써 비슷한 디자인으로 물건을 찍어낸 것이다.#2 탤런트 협찬을 관리하는 A사 관계자는 계약한 탤런트가 옷을 입고 출연하는 날짜를 챙기는 게 일이다. TV화면에 제대로 나오는가도 봐야 하지만 매장에 바로 그 옷이 보급돼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출연 다음날 매장에선 어김없이 "모씨가 입었던 옷 있어요?"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3 클래식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해외 브랜드 B사는 한국용 디자인을 따로 개발한다.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매출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직장여성 C씨는 "이렇게 디자인이 자주 바뀌는 마당에 구태여 값비싼 진짜를 살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4 부산에 사는 주부 D(33)씨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울로 백화점 순례를 온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을 중심으로 '명품 코너'를 돌면서 잡지 등에서 미리 점찍어 둔 신상품을 구입한다. 지방에선 사기 어려운 물건들이다.
부부동반 모임 때는 물론, 사우나 갈 때도 그는 새 옷과 핸드백을 즐겨 착용한다. D씨가 찾는 호텔 사우나의 회원들 사이에서 그는 멋쟁이로 소문 나 있다. 그녀 역시 그 시선을 즐긴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패션에 매우 민감하다. 외국 방문객들의 첫 인상은 대체로 한국 여성들이 모델 뺨치게 예쁘게 꾸미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로 끝나지 않는다. "꾸미기는 하는데 다들 비슷비슷하다"는 덧붙임이다.
옷 색상은 검정, 회색 등 무채색 주류거나 기껏 베이지, 카키 등 중간색 일색이다. 나름대로 다양한 색을 소화하려는 시도가 안 보인다. 스타일 역시 제한적이다. 한때 꼭 끼는 실루엣이 휩쓸고 나면 다음엔 샤(레이스 일종) 달린 치마가 등장하는 식이다.
패션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면 진정한 패션은 없고 유행만 있는 것이다. 한국 여성들에겐 유행이 곧 패션이고, 패셔너블하다는 건 곧 유행에 민감하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래서 우리 패션은 짧게 피고 진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바닥을 질질 끌던 바지 길이는 어느 틈엔가 발목 위로 잘려 올라갔다. 한겨울에도 발목이 나오는 9부 바지를 입었다. 덩달아 발찌도 유행했다.
나일론 코팅 소재의 '프라다 가방', 각진 까르띠에 배낭은 너나없이 들고 다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한 50대 주부는 TV 출연자들을 보며 "왜 요즘은 죄 눈을 허옇게 바르고 다니냐?"고 묻는다. 김희선 코, 고소영 눈, 김혜수 입술 식으로 성형수술에도 정답이 있다.
유행이 범람하는 이유는 유행의 주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의 스타일'을 찾는 게 아니라 '유행의 권위'로 무장할 뿐이다. "너 이거 아니?"라는 투다. 다분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20대 여성들이 '보다 새로운 것'으로 자신을 과시한다면 10대들은 스타를 권위의 중심에 놓는다. 김희선 머리띠, 김혜수 목걸이, god 셔츠, TTL 헤어스타일.. 중장년의 권위는 '해외 명품 브랜드'다. 진짜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소비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니까. 60대 시부모가 며느리를 동반할 때면 으레 찾아가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또 따로 있다.
무조건 유행을 따르는 탓에 체형과 개성을 죽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다리가 긴 체형에 어울리는 9부 바지를 입어 짧은 다리와 굵은 종아리가 부각되고 억지로 끼어입은 듯한 통좁은 재킷을 입어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회사원 E씨는 "선택의 폭을 좁히는 패션업체들이 문제"라고 불평했다. "어느 한 품목이나 색상이 유행하면 다른 것은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어 입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사게 된다"는 것이다.
F사의 관계자는 "사실상 국내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앞서 선보일 만한 영향력 있는 브랜드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안전하게 가려다 보니 해외의 패션 조류를 따르게 된다. 어차피 독창성으로 승부할 게 아닌 이상 경쟁사의 반응이 좋은 물건은 재빨리 따라잡는 게 남는 장사"라고 털어놓았다.
건국대 이인자(의상심리 전공) 교수는 "강남 붐으로 일컬어지는 갑작스런 부유층 형성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형 생활습관을 만들었다. 획일적인 옷 입기는 이러한 행태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일류 대학, 일류 브랜드, 새 것, 해외 경험 등이 자신의 가치를 매기는 수단으로 공고하다. 우리 교육열에 창의성이 없듯 우리 패션엔 개성이 빠졌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누가패션을 이끄는가
누가 패션을 선도하는가? 10대 후반~20대 후반의 미혼 여성,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남성, 전문직이나 서비스직 종사자일수록 패션에 민감하다. 패션 고감도 집단은 감각적 식생활을 즐긴다. 꼭 밥을 고집하지 않고 맛있는 집을 찾아 먹는다.
생과일 주스, 건강식품, 규칙적 운동 등 건강을 추구한다. 미용에도 관심이 많다. DDR, 펌프, 인터넷 게임 등 신제품과 신개념에 흥미를 갖는다. 광고를 즐겨 본다. 그리고 충동 구매에 약하다. 한국패션협회가 지난 연말 발표한 패션수요 예측정보 시스템 구축사업 조사 결과다.
패션고감도 집단의 분포는 서울 강남이 두드러지고 지방에서는 대구, 울산, 부산의 패션감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고감도 집단은 주위 시선에 신경을 쓰는 타인 위주 집단과 자기 편안함을 중시하는 편리 집단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타인 위주 집단은 서울 강남(24%)에, 편리추구 집단은 서울 강북(21.3%)에 많다. 일산에는 타인 위주 집단(23.8%)이 더 많고 분당엔 편리 추구 집단(23.5%)이 더 많다. 편리 추구 집단은 쇼핑하기 편한가, 경제적인가를 따지는 반면 타인 위주 집단은 이를 무시하는 편이다.
또 복장이 자유로운 전문직종, 사람을 많이 대하는 서비스직종 종사자일수록 패션감각이 높고 남을 의식한다. 여성은 10대 중후반-20대 중후반, 남성은 20대 중후반-30대 초반 순으로 패션감도가 높기는 하지만 패션 고감도 집단은 모든 연령대에 고르게 분포한다. 나이를 초월해 패션감각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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