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는다.그 봄기운은 꽃이다. 이 달 중순에서 4월 초까지 길지 않은 기간, 강의 양 쪽 산기슭은 온통 꽃물결로 일렁인다.
노란색 산수유와 연분홍 매화가 먼저 얼굴을 내민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산수유는 10월에 찬 서리를 맞으며 빨간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전북 남원에서 전남 구례로 넘어가는 19번 국도는 봄으로 가는 길이다. 고속도로처럼 잘 포장돼 있다. 왕복 4차선에 제한속도가 시속 80㎞이다.
이 길을 따라 전남과 전북의 경계인 밤재터널을 지나면 왼쪽으로 지리산 온천이 보인다. 뒤늦게 개발됐지만 물 좋기로 소문이 나 관광객이 사시사철 몰린다.
온천 뒷마을인 상위마을(구례군 산동면)이 산수유 세상이다. 지리산 만복대 기슭이다. 산수유 열매 전국 생산량의 60%가 이 곳에서 나온다. 아예 마을 전체가 노란 구름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인다.
산수유는 멀리서 보면 개나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가지와 꽃 모양이 전혀 다르다. 가지는 개나리처럼 처지지 않았고 꽃은 수십 개의 뿔이 난 왕관을 닮았다.
산수유는 특히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군락을 이룬다. 노란색 꽃봉오리가 물 속에서도 반짝거린다. 따스한 봄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가장 유명한 매화촌은 섬진강의 남쪽에 있는 매화마을(광양시 다압면)이다. 백운산의 끝자락으로 청매실농원(061-772-4066)이 이 곳에 있다.
논밭이 적어 가난했던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유실수인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70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온 산이 매화나무로 뒤덮였다. 흩날리는 꽃잎에 눈이 부실 정도이다. 연간 100여 톤의 매실을 생산한다.
청매실농원은 농원이라기 보다는 근사한 공원이다. 매실을 숙성시키는 굵은 항아리가 보기 좋게 도열해 있고, 매화밭 사이로 산책길이 났다.
농원 건물 안에도 통나무 탁자를 여기저기 설치하고 매실차와 과자를 맛보게 한다. 편안한 사랑방이다. 직원들이 무척 친절하다.
매년 꽃이 필 무렵이면 사진작가와 화가, 문인들이 봄빛 영감을 얻기 위해 이 곳에 들른다.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은 장독대 아랫길을 지나 오르는 능선. 꽃이 만개하면 지나는 사람이 꽃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관광객이 몰려 올 때면 그들의 초상화와 커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도 농원 앞마당에 자리를 잡는다. 꽃을 배경으로 그려낸 행복한 표정들. 사진을 찍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청매실농원은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농원으로 들어가는 섬진강 남쪽 도로(861번 지방도로)는 옴짝달싹 못하는 주차장이 돼 버린다.
섬진강 북쪽에도 매화 군락지가 있다.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매화꽃을 보려면 매화마을보다 이쪽을 찾는 것이 낳다. 19번 국도변에서 토지초등학교 송정분교를 끼고 아스팔트 산길을 올라야 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매화의 향기가 짙어진다.
약 1㎞. 길이 끝나고 마을(지도에는 인한수내라고 표기됨)의 큰 느티나무와 함께 매화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드문드문 산수유의 노란 빛이 간을 맞춘다.
4월에 들면 봄의 꽃 축제는 절정을 맞는다. 섬진강을 끼고 도는 길마다 온통 하얀 꽃지붕이 덮인다. 벚꽃이다.
강 북쪽을 달리는 19번 국도는 물론 강 남쪽 861번 지방도로의 가로수가 모두 벚나무이다. 수년 전 심은 나무이다. 아직 덩치가 크지 않아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꽃의 정취에 젖을 만하다.
벚꽃의 명소는 쌍계사길이다.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잇는 4㎞(1023번 지방도로)이다. 흔히 '10리 벚꽃길'이라 불린다.
벚나무의 수령은 평균 50년으로 긴 가지가 2차선 도로에 지붕처럼 드리워져 있다. 꽃이 피면 꽃터널이고 꽃잎이 져 바닥에 떨어지면 꽃길이다. 그 황홀한 모습은 '혼례길'이라는 이름을 낳았다.
꽃이 만발할 때 혼례길에 들어서면 제 정신을 놓친다. 길멀미가 난다. 모두 차를 길 옆에 버리고 걷는다.
걸어서 1시간이면 족한 거리. 그러나 꽃빛에 취하면 두 세 시간이 모자란다.
■맑은 재첩국 한그릇 여정의 피로가 '싹'
섬진강이 제공하는 대표적인 음식은 재첩국이다. 한 그릇에 2,500~3000원. 비싸지 않은 것처럼 결코 요란한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맛의 깊이에 대한 정확한 형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떤 문인은 재첩국을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라고 했다. 그 맛은 시원하면서도 느끼하고, 정갈하면서도 복잡하다.
맛에 낚시바늘 같은 것이 있다. 순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리다가 갑자기 목젖에 푹 걸린다. 그 역한 기운 때문에 인스턴트 식품과 조미료에 길들여진 '서울 촌사람'은 억지로 한 두 술을 뜨다가 말기도 한다. 강원도의 맛 표현에 '느끈하다'는 것이 있다.
재첩국은 빛깔부터 느끈하다. 푸른 우윳빛이다. 가지런히 떠 있는 부추가 뿜어낸 색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국물 자체의 색깔이다.
섬진강의 물빛을 닮았다. 처음 재첩국을 대하는 이들은 그 색깔을 인공적이라고 여긴다. 코발트빛 잉크를 연하게 풀었다고나 할까.
그 잉크는 전체에 퍼지지 않고 표면 아래에서 은근히 비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비롭다. 10㎝ 남짓한 국그릇에 담겨있지만 깊이는 한 길이 넘어 보인다.
재첩은 큰 것은 엄지손톱, 작은 것은 녹두알만한 조개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에 산다. 바닷물의 염분이 녹아있는 동해안 석호에도 있다.
모래 속에 사는 것은 황갈색, 개흙에 사는 것은 검은 색을 띤다. 강바닥을 훑어 잡는다. 처음에는 찬 물에 5~6시간을 담가둔다. 해감을 시키는 것이다.
다음에는 섭씨 20도 정도로 물을 데운다. 조개 입이 벌어지면 살과 껍질을 분리하고 다시 물을 부어 끓인다. 들어가는 조미료는 유일하게 소금. 그릇에 국물과 조갯살을 담고 부추를 썰어 띄운다.
이제는 드물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부산, 마산, 진주 등 영남의 바다 도시에는 아침에 재첩국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재치국 사이소." 낭랑한 목소리는 겨울철 메밀묵 장사의 외침 만큼이나 추억에 남아 있다.
재치국은 남쪽의 아낙들이 전날 밤 과음한 남편을 위해 준비하는 음식이었다. 해독 효과는 물론 강장식품으로도 이름이 높다. 허한 기운을 보해 식은 땀을 흘리지 않게 해 주는 고마운 음식이다.
(가는 길) 19번 국도 드라이브 제격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에서 빠져 남원으로 향하는 17번 국도를 탄다. 임실을 거쳐 남원시 직전에 있는 춘향터널을 지나자마자 19번 국도로 갈아 탄다.
구례, 하동 등에 닿는 19번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명성이 높은 아름다운 길이다. 서울역에서 구례까지 하루 13회 열차가 출발하고,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구례행 고속버스가 하루 4차례 왕복한다. 구례공용터미널 (061)782-3941
(쉴 곳) 화엄사 입구 숙박시설 밀집
구례 화엄사 입구와 지리산 온천 인근에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화엄사 바로 아래 있는 지리산 한화콘도(061-782-2171)와 온천 지역의 지리산온천호텔(783-2900), 송원리조트(780-8000) 등이 규모가 큰 숙박시설이다. 하동에는 섬진각(055-882- 4342) 신라호텔(884-4181) 등이 있다.
(먹을 것) 참게탕, 또 하나의 별미
섬진강을 끼고 있는 거의 대부분 식당에서 재첩국을 판다. 하동의 강변할매재첩국(055-882- 1369) 옛날재첩국식당(882-0937) 등이 유명하다.
재첩과 함께 섬진강을 대표하는 먹거리는 참게. 국물에 된장을 풀고 무, 호박, 토란줄기, 고사리를 넣고 끓인 참게탕은 고소한 향기가 일품이다. 하동읍의 섬진강식당(884-5527) 화개면의 동백식당(883-2439) 등이 참게탕을 잘 끓인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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