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미술은 서구미술에 대한 모방 일변도였을까.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사실과 환영: 극사실회화의 세계' 는 우리 작가들이 서구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끊임없이 독자적 표현세계를 추구해왔음을 보여 준다.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크게 각광받았던 혁신적 미술양식 '극사실회화(Hyperrealism)'는 사물을 사진처럼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기법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아쉽게도 영국작품은 볼 수 없지만, 척 클로스를 비롯, 로버트 벡틀, 로버트 커팅햄, 리처드 에스테스 등 극사실회화를 대표하는 미국작가 10명이 망라돼 있다.
극사실회화의 재미는 작가가 즐겨 그린 고유 영역과 함께 시대 풍경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집과 자동차를 주로 그렸던 벡틀의 그림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 중산층 사람들의 나른한 일상을 체험할 수 있고, 네온 사인등 건물의 대형간판을 주로 그렸던 커팅햄의 작품에서는 클로즈업 기법,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작가의 묘사력을 읽을 수 있다.
에스테스의 '타임스 광장', 톰 블랙웰의 '로이의 골드 윙 오토바이' 는 산업화된 미국 사회의 또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즐거움은 거장 척 클로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주름살, 땀구멍, 심지어 솜털까지 세밀하게 묘사한 초상화 '조' 에는 작가의 개성이나, 인물의 성격 같은 것은 결코 감지할 수 없다. 대신 극사실회화의 차가움만을 느낄 수 있을 뿐..
이처럼 미국 작가들이 프로젝터를 이용해, 구성도 스케치도 필요 없는, 금속성의 그림을 그린 반면, 국내 작가들은 미국적 사실주의에 한국적 감수성을 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이 드러난다.
고영훈 김창영 지석철 이석주 등 국내작가 14명의 작품 56점은 미국보다 10년 늦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완성됐던 작품이다.
지석철의 소파 쿠션에는 단순한 질감 묘사 외에 촉감까지도 전하려 했던 작가의 고집이 드러난다. 현실세계와 일루전의 복합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김창열의 물방울, 김창영의 모래그림에는 '미술은 결국 허구이며 유희'임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다양한 실험적 양식을 시도했던 이석주의 벽돌, 조상현의 표지판 그림 등에는 관념적인 추상회화(모노크롬)에 저항하며 생성된 우리만의 시대적 특성이 배어있다.
4월 29일까지.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4시 전시설명회가 열리며, 7일 오후 2시 삼성본관 국제회의실에서는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김복영 홍익대교수의 극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강연이 마련된다.
송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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