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저명한 벤처 기업인으로부터 자신의 중학생 딸 유학 보낸 사연을 들었다. 피아노를 하는 딸은 해외연주 여행을 다녀와서 등교한 첫날 숙제를 안 해 왔다고 교사들로부터 심한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연주여행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네 사정이고 숙제는 숙제"라는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왔다. 딸은 "이런 학교에 못 다닌다"며 자퇴를 했다.
부모는 부랴부랴 미국의 중학교를 알아봤는데 입학시즌이 지났음에도 딸의 연주 CD를 받아 본 두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를 보내 왔다. 결국 딸은 유학을 갔고 그 학교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고 한다.
본인도 학교분위기에 매우 만족해 하고.
이 벤처기업인이 겪은 일은 특수한 사례인 것 같지만 실은 우리 학교 현장에서 특수한 일이 아니다. 3~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이민박람회와 해외유학박람회를 가득 메운 인파 중에는 자녀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학부모들이 다수였다는 보도다.
박람회장에 가지 않았더라도 이 땅에서 더 이상 자식교육을 시키지 못하겠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주위에 너무나 많다.
초ㆍ중등 교육현장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학교와 교사들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눈에는 학교와 교사들이 훌쩍 커버린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려 하거나 입에 맞지 않은 메뉴를 차려놓고 먹으라고 강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위에서 언급한 벤처기업인의 말을 빌리면 교육독점 구조의 문제다. 과거엔 학생들의 지식 습득원이 주로 학교와 교사였다. 이런 구조에서 교사는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인터넷 시대의 요즘 아이들이 지식을 구하는 곳은 학교 말고도 많다. 공교육을 독점하고 있는 학교의 획일적인 지식공급 및 통제와 교육 실수요자들인 아이들 요구의 불일치, 이것이 교실붕괴로 대변되는 우리 교육현장 위기의 핵심이다.
밤새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메시지 주고 받기에 매달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잠자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초고속 통신서비스(ADSL)와 컴퓨터 및 휴대폰 보급률은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을 집어 삼키는 무서운 홍수다.
아이가 컴퓨터를 못 켜게 아이 방의 컴퓨터를 안고 잔다는 부모, 휴대폰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얼굴만 마주치면 입씨름하는 부모, 그리고 살인적인 사교육비, 이 시대의 부모들은 매우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얼마 전 국민과의 대화에서 교육문제에 대한 답변이 가장 어려웠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합심을 해야 한다는 김 대통령의 말은 지당하다. 그러나 정치권이 교육위기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교단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추진됐던 교원정년 단축을 환원시키려는 정치권 일각의 시도는 그런 의심을 더욱 키운다. 정치인들은 정권쟁탈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계성 정치부 차장
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