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 긴 이별'에 상봉가족들은 또 눈물을 쏟았다.○."남들은 다 풀었던 한(恨)을 나는 더욱 키워왔어."
28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 2청사. 제3차 이산가족 상봉단으로 평양에 다녀온 김유감(77ㆍ여ㆍ경기 광명시)씨는 끝내 만나지 못한 아들 김수남(59)씨가 떠오른 듯 입국장을 되돌아봤다.
김씨는 "중국 출장갔다면 손자나 며느리라도 나왔어야지. 어떻게 마련한 자리였는데"라면서 "평양에서 남측 대표단에게 '소리라도 듣게 해달라'며 전화통화를 요청했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마중나온 여동생이 "50년만에 새끼 찾으러 갔다가 못 만났으면 거기서 죽어야지, 왜 내려왔냐"며 부둥켜 안자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방문동안 두 딸을 만나 "오빠 어디다 감추고 너희들만 왔냐"고 힐책하기도 했던 김씨는 "이제 어디가서 소원을 이루겠냐"며 맥없는 발걸음으로 공항을 떠났다. 김 할머니는 자식들을 남기고 홀로 남하한 죄책감에 50년간 수절했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어."
1969년 대한항공(KAL) 항공기 납치사건 때 납북된 딸 성경희(成敬嬉ㆍ55)씨를 만나 꿈같은 3일을 보내고 28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온 이후덕(李後德ㆍ77ㆍ여)씨의 음성은 감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듯 가늘게 떨렸다.
"경희가 공부를 계속해 연구원 생활을 하고 교수인 사위가 너그럽고 자상해 보이니 이제 아무 걱정이 없다"는 이씨는 "딸과 함께 납북된 여승무원 정경숙씨는 결혼해서 도서관에서 일하는데 딸 식구들과 '이모'처럼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씨는 "경숙이가 '너는 엄마가 찾아와서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니'라고 부러워한다길래 가져간 선물을 나눠주라고 했다"며 "가슴이 아파서 경숙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말은 차마 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30여년간 딸 얼굴 하나만 그리고 살았는데 이제 사위, 손자, 손녀까지 얼굴 네개를 그리워하게 됐네."
○.국군포로 형제들에게 분단의 벽은 누구보다 높았다. 남쪽의 동생들은 국군 출신이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북의 형님을 생각하며 굳게 입을 닫았다.
28일 오후2시 군군포로인 형님 재덕(在德ㆍ69)씨를 만나고 밝은 표정으로 김포공항 입국장에 들어선 김재조(金在祚ㆍ65)씨는 다른 국군포로 소식이나 형님과의 상봉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줄곧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김씨는 "다른 포로는 몰라.
형님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도 이야기 안 나눴어. 안내원 없이 형님과 단 둘이 있은 시간도 얼마 안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국군포로 출신 형님 원호(75)씨를 만나고 돌아온 손준호(67)씨도 상봉소감에 대해 "세월이 말하지 내가 바란다고 되겠느냐"고 애둘러 말했다.
강 훈기자
hoony@hk.co.kr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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