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명문가'라고 할만한 집안이 있을까. 근.현세사에 이름이 오르내린 세칭 명문거벌들이라고 해야 대부분 친일의 오점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돈 많은 재벌가들이 고작.그런면에서 항일투사 김필순(1878~1919)박사를 비롯, 독립운동사의 축소판과도 같은 홍익대 김성국(63.건축학.김박사의 손자)교수의 집안이야말로 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로 손색이 없다는게 사계의 평가다.
■조부 김필순박사
'105인사건' 만주피신 병원열어
독립군 군자금 기부 日에 독살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인 김박사는 1905년 형 김윤오와 함께 서울 복숭아골(현 서울역 앞)에 '김형제 상회'를 개설, 의형제인 도산 안창호, 단재 신채호 등에게 비밀회합장소로 제공하면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김박사는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쫓기게 되자, 일본 유학중인 여동생 김필례(1891~1983)에게 편지를 보내 "속히 돌아와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을 맡으라"고 당부한 뒤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 병원을 세워 모든 수익금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며 항일투쟁에 헌신하다,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의사로 가장한 일본 관동군 특무요원이 건넨 독극물이 든 우유를 마시고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박사 집안의 여성들
조카 김마리아 독립운동 대모
김규식선생등 매제들도 항일
1907년 강제해산된 조선군 부상병동을 치료하면서 민족주의에 눈을 뜬 김필례는 이후 한국 YWCA를 창설, 근대여성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8년 이후 김활란이 주도한 한국 YWCA가 친일로 변질됐을 때도, 그는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모격인 김마리아(1891~1944)는 김 박사의 조카.
1919년 도쿄 2.8독립운동과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른뒤,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미국 근화회 회장등으로 활동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3월 순국했다.
김 박사의 매제들도 집안의 가풍을 그대로 따랐다.
여동생 김구례의 남편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례교회' 서경조목사의 아들 서병호(1885~1972)로 1920년대 상하이에서 교육.기독교 운동을 펼친 공으로 8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또다른 여동생 김순례의 남편은 다름아닌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 선생이다.
■김박사 자녀들
삼남 김덕린 반일영화 주연
큰딸 김위 '임정 외무총장'
김 박사의 삼남 김덕린(1910~1983)은 1930년대 상하이의 '영화황제 김염'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집안의 반대를 꺾고 배우가 됐지만 피를 속일 수는 없었던 듯, '대로' '장지릉운' '장공만리'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반일영화였다.
김 박사의 큰 딸 김위(1915~?)도 조선의용대원을 거쳐 임정의 외무총장을 역임했다.
연세대 박형우 교수는 "애국.애족의 표상이 되는 대표적 가문"이라고 평가했다.
/김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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