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일단 고객이 되면 국내처럼 객장에서 대기표를 쥐고 기다리는 짜증스런 일은 없다. 즉 선진국에서는 아무나 은행고객이 될 수 없지만 일단 고객이 되면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는 말이다.외자유치로 기사회생한 제일은행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소액계좌에 유지수수료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이어 금융감독원이 주도한 산업은행의 현대전자 회사채 인수협조를 거절한 것이다. 글로벌한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금융가에서는 별 일인 셈이다.
소액계좌 거절방침이나 수수료 부과결정은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지만 경영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경영에 대한 외부 간섭이나 영향력 행사가 없다면 은행장은 자기책임 아래 수익과 비용을 감안, 서비스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음식점에서 물만 마시고 가는 손님과 식사를 하고 가는 손님을 똑같이 대우할 수 없다는 호리에 행장의 발언에 공감하게 된다. 만기가 된 회사채 처리는 발행자인 기업과 인수자인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일이지 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다.
시중은행 부실의 원인이 관치금융으로 야기된 부실대출 때문인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급기야 해당기업의 경쟁력을 정부가 지원했다고 미국 무역대표부와 의회에서 문제삼고 있으니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자명해진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제일은행이 선진금융기법의 전도사역할을 했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변화가 외자유치로 거듭난 은행의 몸부림에 그치지 않고 은행전체의 자율경쟁으로 파급될 때 은행업계도 부실여신과 외부간섭의 고리를 끊고 제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변화의 와중에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의 반응이 가장 중요하다. 은행에 자금을 예치하고 거래하는 고객의 최대주안점은 '안전한 은행'이다.
정부지시에 순응하고 공적자금을 수 조원씩 낭비하거나 고객의 불편은 아랑곳 않고 며칠씩 파업하는 은행보단 독립성을 지키려는 은행에 고객의 신뢰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제일은행이 지난해 3,000억원을 넘는 순익을 기록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일은행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두가지다. 하나는 극히 소모적인 헐값매각 논쟁으로 제일은행의 매각이 계속 지연되었을 경우 사회적 비용과 재정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수익성 위주의 선진경영을 통해 우량은행으로 태어난 제일은행으로 인해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제고되었다는 점이다.
김완순 외국인투자 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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