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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왼쪽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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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왼쪽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입력
2001.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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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장석남(36)씨의 시는 자신의 이런 표현처럼, 굳이 시에 쓰인 말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시를 읽음과 동시에 그 말들이 먼저 독자의 가슴 속으로 들어와 앉아버리는 언어의 세계이다. 바둑에 '우주류'가 있다면 우리 시에는 '장석남류'가 있다고도 한다.

장씨가 네번째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발행)을 묶어냈다. 이번 시집은 '장석남류' 언어의 세계가 한껏 개화한 정원이다. 갖가지 기화요초가 만발한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수묵(水墨)의 정원이다.

'마당에/ 녹음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부분)

장씨의 시는 현실의 세계를 드러내거나 혹은 그 현실에 대하여 목소리 높여 발언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다만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 있는 몇 포기 저녁별처럼 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사라진, 현실에서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사라져버려 부재하는 추억의 세계, 혹은 우리 본래의 영혼의 세계를 그는 담담히 들여다 본다.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 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부분)

배, 저녁별, 살구꽃, 어머니는 인천 앞바다 덕적도 섬에서 자란 시인의 삶의 배경을 짐작케 한다. 평론가 홍정선씨가 지적했듯이 그의 시는 이렇게 추억으로, 고향으로 가는 '뒤로 걸어가는 언어들'이기도 하다. 장씨 스스로는 자신의 시작을 '내가 타고 가야 할 아름다운 뗏목'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최근 시는 또한 자주 동양적 넓은 사유의 세계에 기대기도 한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에서 그는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라며 왼쪽 가슴 아래께에 통증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장자의 나비꿈처럼, 시인은 죽은 꽃나무를 뽑아내고는 꿈을 꾸듯 영혼의 통증, 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장씨는 이처럼 아주 낮은 곳에서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우리 언어의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내 서른여섯 살은 그저 지나간 어느 저녁/ 살구를 한 두어 되 따서는/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해두는 수밖에는'(

에서) 없더라도, '내내 내 일생은 그/ 유곽 앞에 서 있던 오동나무처럼/ 가련히 아무데서고 서 있는 거'(

에서)라도 말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못자리를 가꾸듯 차분히 우리 삶을 돌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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