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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정글도 相生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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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정글도 相生을 하는데...

입력
2001.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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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시절 잠시나마 미술가의 길을 꿈꾼 적이 있다. 얼마 전 그 미처 다 꾸지 못한 꿈을 조금이나마 이어 꿀 기회가 있었다.구 워커힐 미술관이 아트센터 나비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며 색다른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뜻밖에도 이 삭막한 자연과학자에게 주제를 구상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아쉽게 끝나버린 꿈을 어떻게든 이어보려 뒤척뒤척 잠을 청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못이기는 척 승낙하곤 곧바로 사이버공간 속에 새롭게 창조할 예술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내 가슴을 달구며 떠오른 주제는 바로 '니취(niche)'였다. 니취란 원래 작은 조각품이나 꽃병을 올려놓기 위해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장식 공간을 칭하는 말이었는데 생태학에서는 한 생물이 환경 속에서 갖는 역할, 기능, 또는 위치 및 지위를 의미한다.

구태여 공간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환경에서 생물이 차지하고 있는 다차원 공간을 뜻한다. 생물은 누구나 환경 속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 즉 역할이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다윈의 진화론에는 흔히 '약육강식' '적자생존'등 다분히 경쟁적인 사자성어들이 따라다닌다.

이 같은 표현들은 사실 다윈 자신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이론에 감화받아 성전을 끼고 세상에 뛰어든 '전도사'들의 작품이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경쟁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니취의 개념도 처음에는 경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하게 동일한 또는 너무 비슷한 니취를 지닌 두 생물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태계 구성이론이다.

이른바 '경쟁배타의 원리(competitive exclusion principle)'에 따르면 두 생물이 환경에서 추구하는 바가 너무 지나치게 겹치면 함께 살 수 없고 반드시 한 종이 다른 종을 밀어내게 된다.

그래서 지구의 생물들은 그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서로간의 유사성을 줄여 공존할 수 있도록 변화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이다.

이렇듯 자연은 언뜻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경쟁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은 여러 다양한 방법들로 제가끔 자기 자리를 찾았다.

어떤 생물은 반드시 남을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모기나 빈대처럼 남에게 빌붙어 조금씩 빼앗아 먹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

경쟁관계에 있는 두 생물들은 서로에게 동시에 얼마간의 피해를 주는 반면, 포식과 기생을 하는 생물들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며 자기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자연은 이렇게 꼭 남을 해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의외로 많은 생물들이 서로 도우며 그 주변에서 아직 협동의 아름다움과 힘을 깨닫지 못한 다른 생물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잘 살게 된 경우들이 허다하다.

이걸 우리는 공생 또는 상생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개미와 진딧물, 벌과 꽃(현화식물), 과일과 과일을 먹고 먼 곳에 가서 배설해주는 동물 등 자연계에서 상생의 미덕을 터득한 생물들은 너무도 많다.

경쟁관계에 있는 생물들이 기껏해야 제로썸(zero sum) 게임을 하는데 비해 상생을 실천하는 생물들은 그 한계를 넘어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인간은 대표적인 상생동물이다.

예전의 생태학에서는 늘 경쟁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미움, 질시, 권모술수 등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이젠 자연도 사랑, 희생, 화해, 평화 등의 개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모두가 팽팽하게 경쟁만 하며 종종 서로 손해를 보는 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함께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한 생물들도 뜻밖에 많고 대부분 매우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처럼 간단한 생태 지혜가 전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이 바로 우리네 정치판인 것 같아 씁쓸하다.

'적과의 동침'도 마다 않고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국경도 거침없이 넘나드는 다국적기업들이 판을 치는 경제계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지혜를 터득했다.

다국적기업만이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서로 손을 잡는다.

청사까지 뚝 떨어져 있어 평생 원수지간으로 살 것 같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상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는 그 많은 국제항공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방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그 기사님이 정치인도 수입을 할 수 있게 되면 지금 같이 허구한 날 싸움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셨다.

그렇다. 우리 정치인들은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오만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유권자라는 포식동물들이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상생의 지혜가 없는 정치인들은 메모를 해두었다가 다음 선거 때 잡아내야 정치생태계도 평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생명공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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