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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현대사 사각지대' 진실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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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현대사 사각지대' 진실케는 사람들

입력
2001.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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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 문화원 농성사건, 원풍모방 노조활동 등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는 등 현대사의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유신과 신군부의 폭압에 희생된 의문사의 진상 규명도 진행되고 있다.박순희 전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과 김형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이 만나 왜 현대사의 사각지대를 파헤쳐 '진실과 정의' 를 캐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박순희(朴順姬)

잊지못할 원풍모방노조 드디어 민주화 운동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66년 대한모방에 입사했다. 75~80년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다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돼 해고됐고 82년 노동쟁의조정법(제3자개입) 위반으로 구속돼 9개월간 복역했다.

가톨릭노동사목 전국협의회장(95~98년)을 역임했고 현재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다.

■김형태(金亨泰)

수도없이 죽어간 사람들 과거증언 당사자마저 꺼려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8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립멤버로 참가해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았고 99년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특별검사보로 활동했다.

덕수합동법률사무소를 잠시 쉬고 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1급상당)을 맡고 있다.

_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라면서요.

▦김형태 = 1989년 임수경 방북사건 변호를 맡았을 때 천주교 관계자로 나오신 박선생님을 처음 만난 뒤 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가 의문사했을 때 다시 뵈었지요. 유족들을 도우셨거든요.

_ 최근 원풍모방노조 활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는데요.

▦박순희 = 82년 9월27일 신군부의 탄압을 받아 원풍모방노조가 해산됐지요.이 날을 잊지 말자고 매년 9월27일 원풍모방 노조원 570여명이 만납니다.

그저께 민주화운동 인정 소식을 듣고 전화한 원풍 후배가 "언니, 우리 인제 빨갱이 누명 벗었어요"라면서 울더군요.

▦김형태 = 정말 뿌듯하셨겠습니다. 가끔 뵙긴 했지만 어떻게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셨는지는 한 번도 듣질 못 했는데.

▦박순희 = 중학교를 졸업한 66년에 공장에 들어갔는데 '공순이'가 된 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노동자들은 성당에서도 외톨이더군요.

그래서 성당에 한동안 나가지 않다가 공장 언니의 소개로 영등포의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에 나가게 됐는데 주임신부였던 염수종 신부가 '노동의 신성함'을 말하시면서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고 하시데요.

갑자기 귀가 뜨이고 눈이 열리더군요. 당시 청바지가 노동자 한 달 월급이었는데 여공 중에는 청바지에 책을 들고 다니던 '가짜 여대생'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영등포 공단에서 '노동자가 소중하다'는 캠페인을 했지요. 70년 전태일열사 분신 소식을 듣고는 고민이 많이 되데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수녀가 될 준비를 했는데 신부님이 "프랑스에는 노동사제도 있다"며 말리시더군요.

그래서 '노동사목'을 하겠다고 74년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에 입사했지요. 일종의 위장취업이었지요.(웃음)

▦김형태= 학창시절 저는 모범생이었습니다. 막연히 사회악을 뿌리뽑겠다는 생각에 검사를 지원했는데 검사시보였던 82년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 파업 주도 혐의로 체포된 택시회사 노조위원장을 조사했는데 아무리 추궁해도 죄가 없어서 무혐의로 석방하고 회사전무를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구속했지요. 일개 시보가 사건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검찰청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그 일로 검사 꿈을 접었어요.

_ 원풍모방 노조가 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것같나요.

▦박순희 = 유신과 신군부의 폭압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이었고 80년대 노동운동의 효시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원풍모방 노조를 비롯한 당시 섬유, 금속, 화학 노조의 활동은 대단했어요.

제가 입사했던 74년, 한국모방 사장이 사원 퇴직금을 정치자금으로 유용하면서 회사가 부실해졌어요.

원풍그룹이 이를 인수해 원풍모방이 됐는데 워낙 노조가 강하니까 회사도 처음엔 노조를 탄압하다가 노조와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노사공동경영협의회를 시작했지요.

직원들의 사기가 오르고 생산성이 높아졌지요. 양복지인 '킹텍스'의 품질이 너무 좋아 제품을 광고할 필요도 없었고 흑자로 돌아섰어요. 다른 업체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은 못 올려도 수익금은 노동자 복지시설에 투자했지요.

▦김형태 = 노사공동경영은 지금도 잘 안 되는데 유신시절에 가능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게다가 노사공동경영의 효율성까지 검증했다는 건 대단합니다.

▦박순희 = 노사 관계도 좋은데다가 수익도 높으니 섬유업계에선 원풍모방이 '눈에 가시'였겠지요. 80년 신군부가 들어선 후 원풍모방 노조가 노동시간을 12시간에서 8시간으로 바꾸고 노조원들이 정치 집회에도 많이 참가하니 탄압이 시작됐어요.

노조간부였던 저는 80년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해고되고 아무 관계도 없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10개월간 수배됐지요.

원풍 노동자 2,100명 가운데 570명이 해고되고 8명이 구속됐고 4명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습니다. 원풍노조는 결국 82년 9월27일 강제 해산됐고 저는 당시 해고자로 파업에 참여하다 제3자 개입으로 구속됐지요.

9개월 복역하고 특사로 나온 후 지금까지 가톨릭 노동사목에 관여해오고 있습니다. 그간 참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어갔지요?.

▦김형태 = 저희 위원회는 69년 3선 개헌 이후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위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는 의심을 받는 죽음을 규명하는 일을 합니다.

최종길 서울대 교수, 장준하씨 등의 죽음이 대표적인 예죠. 지난해 12월 31일까지 유족 및 관련단체로부터 신청을 받았는데 모두 82건입니다.

유신 체제가 절정이던 74~75년, 신군부가 막 들어선 80년, 노동운동이 폭발적이던 87~88년에 의문사가 몰려있더군요.

▦박순희 = 79년 YH무역 파업 당시 죽은 김경숙씨는 의문사에 포함이 안됐던데요. 당시 경찰은 김씨의 사인을 '자해'라고 발표했는데 경숙이는 제가 잘 아는 후배로 자살하는 장면을 아무도 못 봐서 아직도 석연치 않아요. 조작된 사건이나 공권력에 피해를 본 사례는 의문사에 해당되지 않는 것같아아쉽네요.

▦김형태 = 특별법에서 규정한 의문사의 폭이 너무 협소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민주화와 관련있는가, 특히 '적극적으로 항거'했느냐와 상관있기 때문이지요.

처음부터 의문사의 범위를 '공권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사실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상임위원 제의가 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건들이 오래돼 증언과 기억에 의존해야 하고 잘못하면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에 피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유가족들이 찾아와 "당신이 꼭 해야한다"고 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사실 법만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관련자 한 두 명만 증언하면 쉽게 풀릴 문제도 있는데 이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전혀 없거든요. 감사원 비리를 고발한 이문옥 감사관처럼 양심적으로 증언한 내부고발자가 얼마나 불이익을 받고 시달립니까.

의문사의 경우 시간이 오래 흘렀고 가해자들은 물론 피해 당사자들도 그때의 공포 분위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다시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싫어하지요.

▦박순희 = 맞아요. 저도 체포되기 전에 수첩 한 권을 다 씹어서 먹은 적이 있어요.

원풍노조원 이름과 전화번호를 외우다시피 했던 제가 체포 이후로 이름과 숫자를 못 외웁니다. 그만큼 공권력에 대한 공포가 충격으로 남아있는 거지요. 고문을 받았던 사람은 더 하지 않을까요.

-사회 일각에서는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과 보상이 지나치다고 하는데요.

▦김형태 = 우리나라는 가난에 시달리고 6 ㆍ25,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인명과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먹고 살 만해지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화되니까 인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이제서야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민주화운동과 의문사 진상규명은 사회 전체가 피해자들에게 빚을 갚는 것이지요. 물론 일부에서는 '화해'의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해두지 않으면 '정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사의 진상규명은 역사 속에 정의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박순희 = 사실 김영삼 정권 때까지도 형사들이 따라다녔어요. 뿐만 아니라 노조원이었다는 이유로 '빨갱이 며느리'라며 남편에게 이혼당한 친구도 있고, 부부싸움한 후배들도 부지기수예요.

설득하느라 후배들 남편을 만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예요.(이 말을 하며 박씨는 눈물을 보였다) 역사 앞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 이런 일을 통해 자각하고 반성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큰소리치고 모독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노향란기자

ranhr@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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