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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영어 강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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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영어 강박증'

입력
2001.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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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가끔 방문한 한국에서 미국을 떠나기 이전(1994)과 비교해서 가장 쉽게 느껴지는 변화는 영어학습에 대한 나날이 깊어지는 전국민적인 관심과 욕구였다. 사실 영어에 대한 이런 열의나 관심은 당연하다.미국중심의 세계화 속에서 영어의 사용능력여부가 취업기회나 승진여부를 상당히 좌우하고 직무수행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영어가 사회적 신분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실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열의와 관심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 이 영어학습 열기의 영향일 것이다.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20세기를 마감하는 프로에서 나에 관해서 잠깐 보여주었는데 이를 본 아는 이들의 대표적인 반응이 "너, 영어 참 유창하게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있어서 그 프로를 보니 'Hi, Kareen, This is' 정도의 지극히 간단하고 짧은 대목이 편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짧게 나온 영어가 오랜만에 본 이의 외모나 하는 일을 압도하는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 슬프게 다가왔다. 조금은 병적인 민감함 또는 집단적인 열등감의 깊은 내면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열등감의 내면화가 타국어(그것도 영향력도 강한)의 공부나 사용의 가장 싫은 부분이다. 지난 7년간 미국에 있으면서 매일매일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간의 우열구조에 노출되며 살았다.

영어로 말 한 번 거의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유학생활이어서 더했겠지만 영어를 잘하는 이들이 나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아직도 힘들다.

지금도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들었을 때가 가장 기쁘고, 내 억양을 이해 못 한다는 듯이 'what'하고 반문하면 자신감을 잃고 이후의 대화를 망칠 정도로 영어구사능력에 감정과 기본적인 자신감을 좌우당하면서 살아왔다.

나의 경우야 미국에서 지식인으로 살려고 할 때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 체념해야 할 부분도 많지만, 다른 이들이 그것도 한국에서 이런 영어를 둘러싸며 형성된 우열구조에 민감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한 사회의 다른 사회의 언어를 통한 열등감의 내면화가 깊어지는 면도 있고, 자신의 노력보다는 영어사용권 국가에서의 거주나 학습에 필요한 투자가 가능한가의 여부로 주로 만들어지는 영어능력의 이 위계구조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불평등을 더 골이 깊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탓인지 틀린 영어를 쓰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개탄하고, 한국식영어를 하는 이들이 늘 영어공부의 극복대상으로 표현된 글들을 읽을 때마다 그런 식의 접근이 불가피한 면을 알면서도 싫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때 가장 먼저 극복해야 될 부분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실수를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국어가 아닌 상태에서 실수나 자연스럽지 못한 언어구사는 예정된 것이다. 오히려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국말을 안 쓰는(못하는), 영어만 유창한 상대방에게 자신이 영어를 쓰고 있는 것의 수고에 감사하는 태도를 기대하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또한 영어의 오용, 남용은 미국 중심적인 세계 문화경제구조의 파생물이고, 한국식 영어 제조는 어느 정도는 주변국가의 피할 수 없는 문화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인터넷상의 변조된 언어나 별 다를 게 없다. 사실 정확한 영어사용이 지고의 가치인 듯 강요되면서 만들어지는 실수에 대한 심리적인 강박감이나 영어 잘하는 이들을 향한 열등감조장이 영어를 틀리게 사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우스움보다 문제가 더 작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수준 높은 영어의 사용여부에 너무 많은 권위가 주어지고, 그런 영어 사용이 필요치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괜히 위축되고 민감해지는 문화를 극복하는 방안을 같이 찾고 싶다.

권인숙ㆍ미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ㆍ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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