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봄비다. 훈훈한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발목까지 자란 보리 싹이 물빛을 머금어 더욱 파랗다.비를 맞는 변산반도는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영원한 적요는 아닌 듯했다. 폭풍을 기다리는 밤처럼 변산의 바다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정부는 19일로 예정했던 새만금 간척사업의 계속 여부에 대한 발표를 3월 말로 미루어 놓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강행'쪽으로 결정이 난 것으로 보인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33.479㎞)로 바다를 막아 서울 여의도의 140배(4만2,000ha)에 달하는 농지를 확보하는 큰 사업이다.
1971년부터 계획이 입안됐고 1991년 공사가 시작됐다. 현재 방조제의 절반이 넘는 19㎞ 정도가 건설됐지만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의 거센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방조제는 전북 군산시 국가산업단지 끄트머리에서 출발, 비응도를 거쳐 고군산군도에 닿는다.
다시 고군산군도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로 이어진다.
동진강, 망경강이 그 둑에 막히고 김제시의 해안선은 몽땅 다시 그려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크고 넓은 곳일까. 그만한 땅을 얻는다면 잃는 것은 무엇일까. 막연한 상상 속에서 궁금증만 키울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보자.
얻고 잃는 것에 대한 손익 계산은 나중 문제이다. 이 거대한 자연에 금을 긋고 칼질을 해대는 것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인가, 아니면 자연을 알량하게 보는 인간의 교만인가.
이러고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특히 고군산군도와 변산반도는 서해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입을 다물 수 없는 경승과 깊이 있는 불교 유산이 즐비하다.
어쩌면 없어질지도, 아니면 크게 훼손될지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고군산군도는 군산항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의 무리이다.멀리서 바라보면 짐승의 이빨처럼 기세가 출중하다. 이름처럼 산의 무리라고 해야 옳다.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63개의 크고 작은 섬이 물 위에 둥그렇게 도열해 있다.
이 곳의 원래 이름은 군산이었다. 고려시대 수군진영을 두고 군산진이라 불렀다. 조선 세종 때 진영이 인근의 육지로 옮기면서 지명까지 가져가고 이 군도는 옛 고(古)자를 앞에 넣은 새 이름을 얻었다.
고군산군도의 정점은 '선유팔경'을 간직하고 있는 선유도이다. 군도에서 세 번째 큰 섬으로 선유도 해수욕장이 있다. 해수욕장의 모습이 독특하다.
섬과 섬을 약 1.2㎞의 둑이 연결하고 있다. 파도가 만들어 놓은 둑의 바다쪽은 모래밭이고 안쪽은 조개가 지천으로 널린 질펀한 갯벌이다. 모래 언덕의 끝에는 선유도의 상징인 선유봉이 있다.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처럼 돌 봉우리 두 개가 비스듬히 이어져 있다. 유배지의 신하가 임금을 그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망주봉으로도 불린다.
선유도와 연도교로 이어져 있는 무녀도에는 두께 2㎙에 이르는 패총이 있다. 춤을 추는 무녀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섬 이름이 붙여졌다.
역시 선유도와 다리로 이어져 있는 장자도는 군도의 유인도 중 가장 작은 섬. 작은 덩치이지만 맑은 자갈해안, 기암이 어우러진 등산로, 폐교를 꾸며 만든 휴양시설 등이 있다.
1만 여점의 수석과 분재를 모아놓은 수석전시관도 빼 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군도에는 선박을 제외하고 교통시설이 없다. 걷거나 주민의 보트를 빌려서 돌아봐야 한다.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변산반도는 특히 봄에 아름답다. 예로부터 '춘변산 추내장'이라 했다. 검은 갯벌 위로 떨어지는 저녁 노을은 물론, 기암이 장관인 해변, 분위기 있는 포구가 즐비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채석강. 변산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격포항과 격포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물이 흐르는 강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기괴한 모양을 한 거대한 바위이다. 큰 시루떡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중국 채석강 기슭과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채석강의 바위는 수성암이다. 수억년에 걸쳐 퇴적됐다. 물이 빠지면 돌을 밟고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감탄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1988년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 건축업자나 수석업자가 이 바위를 쪼아내 조경용 석재로 팔기도 했다. 또 격포항 방파제를 쌓는데도 많은 양이 들어갔단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아름다운 절이 있다. 내소사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운치와 절도가 있는 절이다.
633년(백제 무왕 34년)에 창건됐으니 1,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 입구에서 절로 들어가는 약 300㎙의 오솔길이 좋다. 아름드리 전나무의 푸른 가지가 지붕처럼 덮여있다.
가장 의미가 큰 곳은 역시 갯벌이다. 김제시의 심포항,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도), 하서면 불등마을 등에서 갯벌을 잘 볼 수 있다.
물이 빠지면 수평선이 지평선으로 변할 정도로 넓다. 새 흙으로 덮고 논을 만들 곳이다. 엄청난 양의 쌀이 수확될 것이다.
'쌀농사 지어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농민의 시름도 함께 깊어 갈 것이다.
■농발게...보디조개 생명이 사라진다
새만금이라는 땅이름은 '새로운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라는 의미. 사업이 완성되면 이름 그대로 1억2,000만 평의 땅이 생긴다. 대부분 논으로 변할 예정이다.
논을 더 만드는 이유는 미래의 식량난을 해소하고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대신 같은 넓이의 갯벌과 바다를 잃는다. 시공 주체인 농업기반공사는 논의 생태가치가 갯벌 생태가치의 2.6배가 넘는다고 주장한다.
갯벌의 연간 생태가치는 평당 4,400원, 논은 1만2,700원이라고 계산한다. 부가가치가 높은 공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갯벌 속에는 생명들이 살아 숨쉰다. 새만금 갯벌은 전국 갯벌의 10분의 1. 우리 갯벌 생태계의 10분의 1이 죽는다는 말과 같다.
이미 절반 이상 만들어진 방조제 때문에 갯벌의 생태계가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이다.
변산반도를 빙 둘러 지천으로 돌아다니던 말뚝망둥이, 갯가 갈대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농발게 등은 그 수가 격감해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가 됐다. 보디조개, 밤게, 가무락조개, 콩게, 동죽, 개불 등의 갯벌 생물도 그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
새만금 유역은 조기와 웅어, 전어 등 서해안 어류의 77%가 서식하거나 산란하는 곳이다.
먹이사슬이 가장 발달한 생기있는 생태계여서 이 곳이 없어질 경우 서해안 어획량이 50%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 있다.
주민들의 웃음도 없어진 지 오래이다. 빈 망태기를 들고 갯벌에서 돌아오는 한 주민은 "우리 밥통이 사라지고 있다"고 허탈해 했다.
■가는 길
고군산군도에 가려면 군산항에서 선유도행 정기여객선을 이용해야 한다. 계림해운(063-446-7171)의 장자훼리호가 오전 8시, 오후 2시께 하루 두 차례 출발한다.
출항시간은 물때와 기상 사정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군산 내항에서 유람선이 수시로 출발하는데 정원이 찰 경우이다.
변산반도는 호남고속도로 신태인 나들목에서 빠져 30번 국도를 타면 닿는다. 갈라지는 길이 많지만 이정표를 보고 계속 30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30번 국도는 변산의 해변을 감아 도는 유명한 드라이브길이기도 하다.
서울서 부안까지 고속버스가 35분 간격으로 출발하고, 부안터미널(063-583-2681)에서 변산까지 시내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다닌다.
변산반도국립공원 관리사무소 (063)582-7808
■쉴 곳
고군산군도에는 정식 여관이 없다. 숙박을 하려면 민박을 해야 한다. 선유도 진리 김덕수씨(063-465-4787)에게 연락하면 민박을 소개해 준다.
비수기이기 때문에 식사까지 미리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변산반도에는 변산온천, 격포, 모항에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변산온천(063-582-5390) 파레스장 (063-584-4659) 등의 시설이 깨끗하다.
■먹을 것
각종 활어회가 푸짐하다. 자연산 활어인 놀래미의 경우 1kg에 7만원 정도이다. 전라도 인심답게 기본 반찬이 푸짐하게 나온다.
변산반도에서 싸게 회를 먹으려면 격포수협위판장을 찾으면 된다. 일반 횟집의 3분의 2 가격에 회를 살 수 있고 종류도 다양하다. 전주그린횟집(063-584-0232), 가고파털보횟집(063-582-8146) 등이 잘 알려진 횟집이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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