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 의 '수괴' 가 올해 서울에 온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한의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다.서울에서 열릴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법 논리로만 따지면 이상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여당 대표는 국가보안법 개정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후에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이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전에 개정하려고 하면 그에 대한 선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민주당에서 흘러 나왔다.
야당을 비롯 일부 개정 반대론자들 사이에서 그런 지적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남북 문제를 결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추진하지 않는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 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여권이 국보법 개정 문제를 야당과 논의할 형편이 못되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연초 '강한 정부' 를 내세운 후부터 야당과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판에 무엇을 진지하게 논의하자고 말을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와 소속의원 다수가 개정에 반대해 온 터였다. 여기에 공동정부 파트너인 자민련은 "북한이 노동당 규약을 바꾸어도 개정에는 반대"라고 한 술 더 뜬다. 이런 상황을 자초한 것은 물론 여권이다.
국보법 개정은 이념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 국가 위상의 문제라고 DJ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는 처음부터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여권 핵심부의 '김 위원장 답방 전 개정 논의 포기' 는 명분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남북 관계에 대한 여야간 논의의 단절이 국보법 개정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여야가 김 위원장의 답방을 둘러싸고 일고 있는 국론 분열이나 이념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언젠가 여야 영수회담에서 국회에 설치하기로 한 남북관계 특위라는 것이 무슨 활동을 하고 있는 지 들어보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남북 관계 얘기를 듣다 보면 여야가 정작 관심을 갖는 것은 남북 문제 진전을 통한 정권 재창출과 김정일 답방후 개헌 시도 의혹 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마저 든다.
새로 출범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대북 정책에 대해 우리가 듣기 좋게 뭐라고 해도 클린턴 행정부와는 확실히 다른게 사실이다.
부시 행정부는 말이 '엄격한 상호주의와 철저한 검증'이지 북한을 '불량국가'로 남겨두기를 원한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같은 대량살상무기 문제 외에 다시 재래식 무기 감축을 들고 나온 것이 이를 말한다. 국가미사일방위(NMD) 체제 추진을 위한 명분과 세계전략에서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근까지도 한미간에 별다른 이견이 없고, 혹시 사소한 견해 차가 있다면 내달 한미 정상회담으로 다 해결될 듯이 말했다. 야당은 새로운 미 행정부 관계자들이 대북 강경 자세를 시사하자 "그것 보라"며 아주 잘 됐다는 모습이다.
긴밀한 한미 공조 없이 남북 문제를 풀어 갈 수는 결코 없지만, 미국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설득하려면 국내에서부터 여야 간에 공감대가 있어야 할 터인 데 마치 서로가 '적의 적은 동지'라며 대치한 형세이다. 남북 문제 마저 정쟁에 휩쓸려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여권은 어차피 붙은 싸움인데 남북 문제 때문에 그만 둘 수는 없고 이 기회에 밀어 붙여 승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지금 여야관계가 어떻든 김 위원장 답방만 이뤄지고 나면 남북 문제는 물론이고 한미 및 북미 관계, 정권 재창출 문제까지 일거에 해결될 것으로 보는 것인가.
야당은 남북 문제에 있어 좀 더 화해ㆍ협력을 지향할 수는 없을까. 정권 다툼 보다 역사의 흐름을 주도해 가는 자세로 큰 싸움에서 이길 생각은 없는가.
최규식 편집국 부국장
kscho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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