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은 넓고 넓어 / 길은 아득히 먼데 / 이 깊은 초원에서 / 마부는 죽어갔네"(러시아 민요 '초원은 넓고 넓어'중)러시아 민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마부이다. 때로는 트로이카를 몰고 와서 편지를 전해주는 우편배달부로, 또 때로는 눈보라치는 초원에서 죽어가며 가족에게 애절한 안부를 전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마부. 먼 거리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마차를 모는 마부는 러시아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고 그만큼 삶의 애환이 마부를 통해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러시아를 생각할 때 체제 문제를 떠나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영토의 광대함일 것이다. 드넓은 러시아 땅은 주로 숲과 초원, 그리고 그 점이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초원도, 마부라는 존재도 우리에게 다시 몽골 지배기를 떠올리게 한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유라시아 초원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몽골제국의 지배를 극복한 후 역으로 그들의 영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였고, 러시아어로 마부를 뜻하는 '얌쉭(yamshchik)'이라는 말은 몽골제국의 교통체제였던 '잠' 곧 역참의 러시아어형인 '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선사시대부터 초원지대 유목민족들과의 전쟁과 교류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 왔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최고의 보물 가운데 하나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는 바로, 키예프시대 남부의 공령인 노브고로드 세베르스크의 통치자 이고리 공이 1185년에 동남쪽의 유목민족인 폴로베츠(쿠만)인들에 대한 원정에 나서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나온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러나 동쪽 지역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문지리학적 지식은 볼가강 동북쪽의 유목민족인 불가르인들의 거주지역까지로 국한되어 있었다. 더 동쪽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도래했을 때 연대기 기록자들은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말을 몇 번이고 숨가쁘게 되풀이했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과거에 러시아인들이 상대했던 유목민들과 달랐다. 이전의 유목민들은 국경을 자주 침범하기는 하였으나 러시아 영토를 지배한 적은 없었으며, 정치체제에 영향을 미친 적도 없었다.
정착농경민족에 대한 그들의 무력행사는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약탈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세력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우세하고 다른 쪽이 일방적으로 열세에 몰리는 일도 없었다.
이에 반해 몽골인들은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러시아 정치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그 때까지 전혀 모르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 주었다.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이제 칸에게서 공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금장한국의 수도까지 다녀와야 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카라코룸까지 가서 대칸을 알현해야 했다.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러시아인들이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금장한국의 수도 사라이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아스트라한, 곧 볼가강이 카스피해로 흘러들어 가는 입구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약간 더 북쪽, 오늘날의 볼고그라드 맞은편으로 옮겨졌다.
이 곳으로의 여행만도 먼 길이었는데, 몇 개월씩 걸리는 카라코룸까지의 왕래는 더욱 고된 일이었다.
13세기 중엽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었던 야로슬라프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모두 대칸을 만나러 차례로 카라코룸까지 가야만 했는데, 야로슬라프는 카라코룸에서 병사했고 그 후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사라이에 갔다가 귀환하는 도중 사망하였다.
지배자들뿐 아니라 러시아의 일반 백성도 몽골제국의 영내로 흘러 들어갔다. 러시아인들은 병사로서 몽골군대에 복무했고 정교회 선교사, 상인들이 사라이를 드나들었으며 금은세공사를 비롯한 수공업자들이 카라코룸, 베이징(北京)까지 끌려가 정착했다.
기마민족인 몽골인들이 광대한 공간을 잇는 교통수단으로 발전시킨 역참제는 러시아인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 전에도 말이나 마차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래 러시아인들에게 공간을 잇는 교통망으로 중요했던 것은 수로였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도, 발트해 연안지역과 노브고로드_러시아 북동부_볼가 불가르인들을 동서로 잇는 모피무역로도 바다와 강 그리고 호수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육로교통은 강과 강 사이를 이어주는 짤막한 막간에 불과하였다. 수로가 훨씬 더 빠르고 값도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해서 러시아에 곧바로 역참제가 도입된 것은 아니다.
몽골인들은 러시아에 무엇인가를 건설하면서 통치의 가시적인 흔적을 남겨 놓은 지배자들은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몽골 지배자들에게 '얌'이라는 명칭의 세금을 내기는 했지만 이는 제국 내 다른 지역에 만들어 놓은 역참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었을 뿐이다.
몽골 지배기에 러시아 자체 내에서는 광대한 공간을 연결하는 수단으로서 역참제의 효율성은 숙지되었으나 이처럼 거대한 '교통혁명'을 주도할 만큼 재정능력을 갗춘 권력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정작 러시아에 역참제가 도입된 것은 몽골 지배를 극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대내외적으로 러시아의 명실상부한 독립적 통일군주가 된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몽골 지배 종식을 선언한 1480년 무렵부터 역참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노브고로드처럼 중앙정부에 반항적인 지역과 모스크바를 잇는 구간에 먼저 역참제가 도입되었다.
16세기 초 러시아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귀족 폰 헤르베르슈타인은 약 640 ㎞ 거리인 노브고로드_모스크바를 72시간만에 여행하였으며(하루 평균 214㎞), 이는 놀라운 일이라고 러시아 역참제의 효율성을 찬양하는 글을 남겼다.
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역참제의 기본원리는 동일했다. 국가의 역참이용 허가증을 지닌 공무담당자가 곳곳의 역참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갈 수 있었고 역참지기는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새로운 말을 공급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는 파발꾼들, 관리들, 군주의 사신이 역참제의 가장 중요한 이용자들이었다.
러시아의 역참제는 곧 신속히 확대되어갔다. 러시아가 금장한국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나아가 시베리아까지 정복한 후에는 새로운 영토에도 속속 역참이 설치되었다. 이제 수로는 역참이 없거나 육로교통이 너무 비효율적인 지역에서나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얌쉭이란 말은 역참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역참과 무관하게 사적으로 말을 모는 마부도 모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수즈달에서 야로슬라블로 가던 길에서 '가브릴로프 얌'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발견하였다. 혹시 가브릴이라는 역참지기가 일하던 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여 일부러 그 마을로 차를 몰아갔으나 우리 물음에 현지 주민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긴 교통수단으로서 마차가 무의미해진 오늘날 그들에게는 얌이라는 역사적 제도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평원 위로 쓸쓸한 노랫소리 울리며 먼 길을 가는 얌쉭"에 관한 민요를 부를 때, 그 옛날 몽골인들이 자기네 선조들에게 이 세계는 이렇게도 광대하다는 것과 이를 연결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러시아 기차
과거의 러시아를 이어준 것이 마차였다면 지금은 기차다.
광대한 땅에 비해 항공편의 발달이 더딘 러시아는 옛 유럽의 연장선장에서 철로가 잘 발달돼 있다.
서북쪽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동쪽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주요 도시는 모두 철로로 연결되어 있다. 경의선이 유럽으로 연결된다는 기대도 바로 러시아의 철로 때문에 가능한 구상.
특히 수도인 모스크바에는 전역으로 흩어지는 철로를 따라 기차역만 9개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역이름이 도착지를 따라 붙여진다는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는 레닌그라드(옛 상트 페테르부르크)역에서, 키예프로 가는 기차는 키예프역에서 출발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역시 모스크바로 가려면 모스크바역을 가면 된다.
러시아의 기차는 유럽식으로 객실이 컴파트먼트로 나뉘어있다. 대개 6인1실, 4인1실, 2인1실이며 침대나 좌석형을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주요 노선의 승객이 많은 시간대는 대개 침대차다. 객차 한 량마다 차장이 1, 2명 있는데 대부분 여자다. 이들은 객차 앞에서 개표를 하고 승객들에게 수건이나 베갯잇 등을 나눠준다.
무임승차를 막기 위해서인지 차장은 차가 멈추면 화장실 문을 잠궈버린다. 이 때문에 역이 가까워오면 승객들이 갑자기 화장실로 몰려들어 동작이 느린 사람은 이용하기 힘들다.
기차는 유럽식을 닮았지만 유레일패스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 어떤 역에서는 외국인들은 외국인 전용 창구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표를 사야 한다. 값은 내국인의 2배 정도 든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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