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그러나 우리들이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공포와 불안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우리는 되도록 죽음이라는 현상을 외면하려고 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신문에서 부고 기사를 읽을 때나, 친지의 죽음을 겪고 빈소에 앉아 있을 때 정도다.
우리를 죽음에 대한 상념에서 구원하는 것은 바쁜 일상이다. 우리는 바쁘게 살며 죽음에 대해 잊는다. 그것은 사회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우리에게 늘 들려 있다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잡념에서 해방된 노동이다.
한편, 사람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 생각의 대상에서 죽음의 의미가 제외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것이지만, 죽음이 공평하게 모두에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절대적 불안과 공포가 과연 합리적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죽음의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은 필요하다.
젊은 철학자 유호종씨의 '떠남 혹은 없어짐'(책세상 펴냄)은 그 부제가 드러내듯 '죽음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탐구다.
이 작은 책에서 저자는 죽음과 관련해서 현대에 제기되는 물음 세 가지에 대해 답변을 시도한다. 물음들이란 '죽음 이후 나는 영원히 사라지는가'라는 인식적 차원, '나의 죽음은 정말 나에게 나쁜 일인가'라는 정서적 차원, 그리고 '인간은 어느 시점부터 죽었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차원의 물음이다.
첫 질문에 대해 저자는 죽음과 함께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현재와 같은 감각 경험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상태인 죽음 이후를 해명하지는 못하며, 더 나아가 나의 죽음 후 내가 어떻게 될지는 감각 경험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추론적인 사고로는 개연적으로라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자기의 죽음은 자기로부터 좋음(좋은 것들)을 박탈하기 때문에 나쁘다'고 보는 '박탈 이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나의 죽음 후 내가 사라진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죽음은 내재적으로나 비교적으로나 가치가 중립적(零)일 뿐 나에게 나쁜 것으로 판명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번째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죽음의 실천적 의미가 '어떤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하는 사건'이라는 데 유의해 심폐사(心肺死)만을 죽음의 기준으로 보되, 삶과 죽음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두 항 사이에 의식(意識)의 불가역적 소실로서의 '인격사'를 삽입해 삼분법적 시각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소재로 논리학 연습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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