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초 24년 만에 들른 하와이에서 아내는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지금부터 29년 전. 그때 나는 하와이대 박사자격 시험에 떨어졌었다. 미국 본토의 캔사스대에서 과학사를 공부해 석사학위를 얻은 다음, 박사학위를 위해 하와이로 와 있었다.
박사 논문을 제출하려면 먼저 그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런데 그만 그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박사 자격시험은 4과목을 두 차례 볼 수 있는데, 나는 두 번 모두 실패해 최종 낙제가 결정될 판이었다.
때 마침 우리에게는 둘째 아이가 막 태어났다. 이미 아들 하나를 갖고 있던 우리 부부에게 둘째(딸)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만약 내가 그 시험에만 패스했더라면.
하지만 바로 그때에 나는 그 시험에 최종 불합격하고 말았으니, 우리 네 식구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제 귀국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나는 엉뚱한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학교도 두 가지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게 석사자격 시험의 '합격서'를 보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심사한 역사학과 교수 4명이 규정에도 없이 필기시험 4과목은 합격시킨 다음 두 차례 모두 구술시험에서 낙제를 시킨 점이다.
학과 규정을 조사한 결과 내가 본 4과목은 과목낙제는 시킬 수 있어도 필기 시험을 합격시키고 구술에서 떨어지도록 결정할 수는 없게 돼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핑계로 학과를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나는 그것이 법정에서 해결될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고, 그런 문제를 실제로 법정까지 가져갈 수 있었을까, 지금도 자신이 없다.
여하튼 학교측은 나를 가엽게 여겼던지, 또는 고소라도 당할까 봐 겁을 먹었던지,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두 번째 시험 본 것을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험을 보게 해 준 것이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자격 시험을 통과했고, 그후 5년 동안 박사학위 논문만 준비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서점에서 50년대말 과학철학 강의를 청강한 적이 있는 김준섭 교수님을 뵙고 인사했다.
그 인연으로 귀국한 김선생님은 나를 외대에 추천해 주섰다. 외대에서 초청을 받고, 1년 동안 급히 논문을 써 낸 다음 우리 가족은 귀국했다.
그후 아내는 처음으로 하와이를 들른 것이다. 아마 아내의 뇌리에는 내 박사학위에 얽힌 그 '평생 잊지못할 일'이 되풀이되며 떠올랐을 것이리라.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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