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나 정원은 오래되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그 첫번째 정원이 요순 시대에 있었고, 에덴 동산이었고, 목소리를 통한 클로드 로랭의 그림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풍경이었다.인류로 하여금 그것 없이는 살기는 물론, 죽을 수조차 없게 하는 저 황금 시대, 그 이름이 정원이다. 그러기에 어떤 정원도 아주 오래된 인류의 꿈이었다.
이 열정 때문에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릴 수조차 있었고, 무수히 붉은 수레바퀴를 돌려 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류는 감옥 속에서도 바람에 불려온 민들레 씨앗을 창틀에 정착시켜 키울 수조차 있었다.
이 굉장한 식물적 상상력이 김지하의 시였고, 황석영의 소설이었다. 그것은 자유라는 말로는 감히 미칠 수 없는 영역, 생명력이라 해도, 꿈이라 해도 부정확한 그 무엇이다.
굳이 말한다면 시와 소설이다. 이를 두고 그들은 겸허하게도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김지하)이라 했고 '오래된 정원'(황석영)이라 불렀다.
이 숲그늘이나 정원에 가면 바로 그 민들레를 만져 볼 수조차 있다. 이 나라 문학판에 내리는 20세기스런 정복(淨福)이 아니었던가.
농담도 아주 오래되어야 한다. 그 농담하는 방식 혹은 그 어법을 일러 소설이라 불렀다.
그런데 굳이 이를 가리켜 인류가 발명해 낸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 부르는 까닭은 새삼 무엇인가. 아니, 대체 농담이란 무엇인가.
야유, 빈정댐, 비꼬기가 이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이른바 아이러니라 부르는 어법이 그것. 어째서 이 어법을 여자들, 아이들, 그리고 혁명가들이 제일 싫어할까.
이 물음에 민첩하게 대답한 사람이 조세프 콘라드였다. 고결한 소질, 신념, 헌신, 행동 등의 덕목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어법이 농담이다.
유독 농담이 사람들을 못살게 굴거나 성내게 한다든가 공격한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인식케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가진 확신을 빼앗거나 흔들리게 하기 까닭이다.
서유럽을 우습게 알고, 후설이 마지막 강연을 한, 중부 유럽의 상상력을 기린 프라하 출신의 소설가 쿤데라는 이 농담이 어째서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해한가를 썩 그럴 법하게 설명해 내었다. 진짜 농담이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소설이란 아무리 쉽게 쓰고자 해도 그 속성상 불가능하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새삼 무엇이뇨.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진짜 농담을 가리킨다.
쿤데라의 말투로 하면 진짜 소설을 가리킴이다. 이 점에서 작가 박완서는 민첩했다.
가족에게 집 한 채 남겨주기 위해 암에 걸린 가장이 스스로의 수술을 거부하고 자살하는 통렬한 농담, 이를 두고 돈만 아는 자본주의에 대한 농담이라 부른다면 너무 잔인하다.
주인공의 자살이 이 나라 분단 현실의 현장감이라 해도 사정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농담'(박완서), 그러니까 아주 제대로 된 소설이란 풀 수 없는 농담이기에 누구의 확신이나 신념도 흔들게 마련이다.
어찌 농담이 황금 시대, 청동 시대만의 산물이겠는가. 죽음만큼 대단한 농담도 흔치 않는 법.
죽음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누구도 태양과 죽음만은 직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닥쳐오는 죽음이야말로 하이데거와 더불어 인류의 진짜 농담이 아니었겠는가.
본질이란 아무리 영원하고 대단하다 해도 시간 속의 논의에 지나지 않는 것. 이 본질에 대한 어법, 그러니까 농담이란 시간이 주역을 맡을 수밖에.
이 점에서 작가 최일남의 '아주 느린 시간'은 또 한 번 민첩했다. 시간을 아주 느리게 만드는 방식이 그것. 죽음, 본질, 영원한 것에 대한 공포를 범속한 일상성으로 인식하는 어법이 최씨 일류의 방식이었다.
아주 느린 시간 속에 죽음을 놓아두기가 그것이다. 이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죽음이란 없고 단지 내가 죽을 뿐이라는 것.
농담이 지닌 소설적 어법의 시선에서 보면 이 나라 문학판은 21세기에도 싱싱한 아주 오래되고 또 제대로 된 정원이 아닐 것인가.
김윤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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