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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은행임원된 前축구선수 김재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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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은행임원된 前축구선수 김재한씨

입력
2001.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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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金在漢ㆍ54)씨는 두 가지 삶을 살아왔다. 하나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로서의 삶이고, 하나는 은행원으로서의 삶이다.1970년대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리다 은행원(주택은행)으로 변신했던 그는 지점장을 거쳐 은행원의 '꽃'이라는 본점 영업부장을 2년이나 지내더니 얼마 전에는 임원직(주택은행 동부지역본부장)에까지 올랐다.

한 가지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 눈으로 보면 대단한 성공이다. 그것도 둘 다 늦게 시작해서 거둔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작한 축구에서는 스물 여섯이 되어서야 대표선수로 뽑혔지만 서른 세살로 은퇴할 때까지 한국 최고의 골게터로 실력을 떨치며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은행 일도 마흔이 훨씬 넘은 1990년에 시작해 불과 10년 남짓만에 서울 동ㆍ북부와 경기 동ㆍ북부, 강원 일원의 주택은행 점포 61개를 관리하는 지역본부장이 되었다.

그는 " 늦게 시작해서 늦게까지 하는 것이 내 운명인 모양"이라면서도 "그저 열심히 해온 게 이렇게 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_열심히 해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다는 뜻인가?

"79년에 현역생활을 마치고 다시 10년간 주택은행 코치, 감독을 하다 개포동지점 차장으로 발령 났다. 전혀 새로운 생활을 하려니 마음 속에 갈등도 생기고 겁도 났지만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출근을 했다.

첫 출근 하면서 각오를 한 것이 있다. '매일 차를 열잔 이상은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차를 열잔 마시려면 열명 이상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

그저 많은 사람을 만나 예금을 권유하면서 살았다. 얼굴이 알려진 탓 때문이었는지 사람을 만나기도 쉬웠고, 예금유치도 수월했다.

그러면서 실적이 쌓이니까 윗사람들 눈에 들었던지 곧 지점장이 되고, 본점 영업부장까지 시켜주더라."(차장 때는 하루 열잔씩이었지만 지점장, 영업부장이 된 후에는 하루 스무잔을 마시게 되더라고 말한 그는 지역본부장이 됐으니 더 마셔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_결국 인간관계를 잘 맺어 은행에서도 성공했다는 말인데 IMF 이후에는 인간관계보다는 은행원으로서의 실력이나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관계 외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나?

"물론 시스템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시스템을 움직이는 건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사람이 잘 못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인간관계는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고객과도 잘 지내야 하지만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가 유지되도록 관리해야 한다. 비장의 무기라는 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건 있다.

개포동지점 차장 때 지점 2층의 빈 방에 '개포골 사랑방'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녀회, 노인회, 상가번영회, 각종 동호인모임, 심지어는 계모임 장소로도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적이 있다.

장소만 빌려준 게 아니라 회의자료를 복사해주고 탁자에는 다과 외에 볼펜과 메모지까지 준비해놓아 편안히 이용하도록 했다.

금방 좋은 소문이 나더니 얼마 안돼 인근 다른 은행 지점은 물론 저 멀리 천호동의 모 은행지점에서도 찾아와 벤치마킹해갔다. 그런 서비스는 내가 처음 시작한 것 아닌가 싶다."

_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

"부지런하고 친절해야 한다. 고객 본인은 물론 가족의 생일이나 졸업 기념일 같은 날 전화로라도 축하해주면 관계가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기념일 같은 건 자주 만나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알게 된다. 직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꾸지람보다는 격려를 많이 하고, 약한 부분을 잘 할 수 있도록 충고하면 내부 사기도 올라간다. 사기가 높은 조직이 잘못 되는 건 본 적이 없다."

"부지런하고 친절하게 인간관계의 기본원칙"

_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면 고객이나 직원이 '나를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 나를 이용해 실적을 쌓으려는 것 아니냐'는 뒷말이 있을 것 같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얼굴이 알려져서인지 내가 누구를 아는 체 하면 그 분들이 더 좋아하더라. 그래서 점수를 따는 게 아닌가 한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고객이 점포에 다시 오면 아무리 바빠도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고 시간이 있으면 차 한잔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보니 그분들이 내가 사람이 좋다고 소문을 내주고, 또 다른 고객이 찾아오고 그런다."

_윗사람에게 잘 보여서가 아니라 고객에게 잘 보이니까 잘 되더라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본점에 있으면서도 윗분에게 한 번도 눈도장 찍으러 일부러 찾아다닌 적은 없다. 고객에게 잘 하는 게 윗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VIP 고객은 여러 은행에 예금계좌를 갖고 있기 예사인데 친절하게 대하다 보면 그 고객이 다른 은행에 정기예금이 얼마 있고, 언제 만기가 되고 하는 이야기도 듣게 되는데 만기일을 기억했다가 '이제는 우리 은행에 맡겨보시죠'라고 권유하면 거의가 거절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주민사랑방 만들었더니 다른 은행서도 벤치마킹"

_머리가 상당히 좋은 모양이다. IQ가 얼마나 되는지?

"보통은 된다."

_영업본부장이 하는 일은 뭔가.

"일선에서 영업하는 각 지점의 활동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부서다. 그들의 영업활동에 애로가 있으면 뚫어주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축구와 은행영업은 비슷한 점이 있다며 일선 지점은 골을 넣어야 하는 공격수이고, 본점의 기획부서는 실점을 막아야 하는 수비수이며 인사, 총무부서는 영업조직과 기획부서를 연결하는 지원조직으로 미드필더와 같다고 했다.

그는 영업본부장으로 취임한 날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이 공격수들 위에 군림하려들면 골을 못 넣게 되므로 직원들에게 절대 산하 지점에 군림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들이 최대한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자"고 당부했다.

"축구와 은행영업은 비슷 내임무는 공격수 지원"

_만일에 은행장이 되어도 그런 방침으로 경영을 할 것인가.

"은행장은 무슨‥, 여기까지 온 것도 분에 넘치는데, 그런데 지금도 사실은 소은행장이나 다름 없다. 지점 61개를 관리하고 있으니 말이다."(그는 47년 생이다.

주택은행에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없고 김정태 행장은 그와 동갑이다. 그는 작년에 몇 명 있던 47년생들이 만나 '이제 우리는 끝났다.

자진해서 그만 둬야지 않나' 등 말을 나눈 적이 있는데 이번 인사에서 자신만 남아 승진까지 하게 되자 '은행이 아직 나에게 시킬 일이 있구나'고 감격했다고 말했다.)

_원칙적으로는 대출을 해줘서는 안 되는데 높은 사람이 봐줘라라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런 일이 없었나.

"대출자격에 관한 개인정보가 모두 전산화되어있어 안 되는 걸 되도록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전산에서 대출부적격자라고 나오면 대출이 이뤄질 수 없게 되어있다.

은행이 시스템화되어 좋아졌다는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이다. 전에는 국회의원비서관, 언론종사자들의 무리한 부탁이 많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사정을 알아서인지 많이 줄었다."

"머리가 영리해야 축구도 잘 합니다"

_축구를 그만 두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았을까.

"프로팀 감독은 한 두 번 했을 것이다. 사실 축구를 그만둘 때 갈등이 심했다.

프로팀이 생겨나고 있어 해외코칭스쿨을 다닌 후 프로팀 감독을 하는 게 내 일이 아닌가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축구 감독은 참 어려운 직업이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운이 안 맞으면 하루 아침에 도태된다.

힘들여 스카우트한 우수 선수가 부상으로 몇 경기를 못 뛰면 성적이 떨어지고, 심판의 순간적인 오심으로 경기를 져도 감독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은행으로 돌아섰다."

_축구선수로 더 열심히 살았나, 은행원으로 더 열심히 살았나.

"축구도 열심히 했다. 몸 관리도 잘 했고, 경기도 성실히 했다. 선수시절 옐로카드를 한 번도 안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성실성 때문에 서른 셋이 될 때까지 대표선수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하다 야구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3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 축구를 시작했으며, 건국대를 거쳐 제일모직과 주택은행 축구팀에서 뛰다가 스물여섯살 때인 1973년 열아홉살이던 차범근과 함께 대표선수로 발탁됐다.

190㎝의 장신인 그가 차범근의 센터링을 받아 방아를 찧듯 헤딩으로 골을 넣는 장면은 온 국민을 열광시켰다. 당시 아이들은 "떴다 떴다 김재한, 달려라 차범근!"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_축구선수로 가장 아쉬웠던 기억은 뭔가.

"73년 서울서 열린 뮌헨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이겼던 게임을 비겨 결국 본선진출에 실패했던 일이다.

내가 한 골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전반을 2대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골 관리를 못해 비기게 됐다. 그 때 이겼더라면 월드컵 본선에 나갔을 것이고, 내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_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축구를 오래 하면 헤딩을 많이 해서 머리가 나빠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말 그럴까.

(이 질문을 한 건 우리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영리한 아이들이 축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본만 해도 좋은 집의 영리한 아이들이 축구로 인생을 개척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가 축구를 하겠다면 펄펄 뛰는 부모가 많은 게 우리 실정 아닌가.)

"무슨 소리냐, 축구야 말로 머리가 나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는 운동이다. 감독의 지시가 많은 야구와 달리 축구는 일단 운동장에 들어서면 선수 개개인이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며 뛰어야 하는 운동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축구를 하다 다른 삶을 시작한 후배 가운데 성공을 거둔 사람도 많다."

편집국 부국장 so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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