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 분야 인력들이 미국 일본 유럽을 향해 짐을 싸고 있다. 외국행을 택하는 두뇌들은 10년차 이상의 중진급 연구원이 많아 기술공백은 물론, 첨단기술 유출의 우려마저 낳고 있다.대덕 연구단지의 간판격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지난 한햇동안 외국으로 빠져나간 기술인력은 모두 19명.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1999년에 비해 3배 늘어났다.
연구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물론, 국책 연구에도 차질이 생겼다.
연구인력 충원을 위한 장려금제도 등이 마련됐지만 국내외 헤드헌터들이 좋은 조건을 내걸고 연구원들을 유혹하고 있어 충원은 커녕 기존 연구원의 이탈을 막는데도 애를 먹고 있다.
민간연구소는 더욱 심각하다. 현대전자 연구소의 경우 핵심분야인 반도체 연구진만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30%가까이 빠져 나가 입사 10년차의 과장급 이상 연구진은 이제 3~4명에 불과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 등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급 연구원 Y(38)씨는 "10년 재직기준 연봉에서 2배 이상 많은 10만 달러(약 1억2,000여만원)를 제시하는 외국기업의 스카우트 제의에 귀가 솔깃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 놓았다.
'대우신화'의 산파를 자부해온 대우고등기술연구원은 IMF이후 40%이상의 인력이 이탈하면서 정보통신 등 일부 분야는 아예 연구를 포기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의 열악한 연구 환경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해외진출을 모색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연구원도 상당수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미국 등 외국기업에 취업해 떠나는 취업이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97년에 3,287명을 기록했던 취업이민은 98년 3,805명, 99년 5,267명, 지난해에는 8,369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해외 유학도 두뇌유출의 경로가 되고 있다. 국제교육진흥원에 따르면 국비유학생의 5%이상이 유학기간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현지 정착하고 있다.
특히 생명공학 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경우 국내에 연구기반이 취약해 우수 유학생 상당수가 현지 연구소나 기업체로 직행하고 있다.
두뇌유출은 당장 기술개발은 물론, 경제의 성장 잠재력까지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
영국이 두뇌유출 방치 기금을 설치하는 등 세계 각국이 두뇌유출을 저지하고 우수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대학 윤정로(尹淨老ㆍ사회학) 교수는 "두뇌유출과 관련한 기술 빼내가기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하게 될 것"이라며 "연구기반의 확충 등 국내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철기자 kckim@hk.co.kr
김정곤기자 kimjk@hk.co.kr
■'두뇌 공동화' 국책硏 존립 흔들
"국책연구기관에 근무한다는 긍지는 오래 전에 내던져 버렸습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천기술연구소의 선임연구원 A박사(41)는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같은 팀에 근무하다 미국 벤처업체로 진출한 B박사(41)가 현재 연봉의 2배 이상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합류를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만 국책연구소
국제통화기금(IMF) 직후의 구조조정 태풍과 벤처창업 열기도 가라앉았지만 국책연구소의 두뇌유출 현상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ETRI에서 지난해 DXO 텔레콤, CMI 등 미국 정보통신 회사를 포함한 해외 업체로 빠져나간 연구원은 공식적으로 19명. 99년 6명, 98년 6명, 97년 3명에 비하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기술 소유권, 특허권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관행을 고려하면 실제 해외 업체로 이직한 연구원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보따리를 싸는 이유는 외국기업에 비해 형편없는 보수를 비롯한 열악한 연구환경 때문.
연봉이 외국 기업에 비해 턱없이 적은데다 98년부터 시작한 3년 단위의 계약제로 고용까지 불안해졌다.
게다가 36개 정부출연연구소 가운데 건설기술연구소 등 17개는 기획예산처의 '기관운영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출연금 지급이 유보돼 연구원들은 기본급만 받고 있는 상태다.
이와 함께 연구개발을 위한 인프라의 부족과 한국 미래에 대한 회의, 미국 등 선진국의 적극적인 하이테크 기술인력 유치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40명중 39명이 떠나고 싶다
대덕단지 등 국책연구소의 두뇌 유출은 단순한 전직 수준을 넘어 연구소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로 악화되고 있다.
ETRI에서만 IMF 직후 구조조정으로 500명 가까운 연구원이 퇴사했고 벤처창업 열풍으로 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400명이 연구소를 떠났다.
P연구원(37)은 "과거 10억~20억원 단위의 연구예산이 최근에는 2억~3억원 정도로 줄었지만 작은 프로젝트조차 수행할 인력도 없는 형편"이라며 "국책연구소다운 면모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40명의 연구원 가운데 39명이 연구소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민간연구소의 경우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현대전자에 흡수된 LG반도체의 경우 합병 직전 수십명의 연구인력이 해외로 빠져 나간데 이어 합병 뒤에도 속속 이탈해 외국행을 택했다.
LG의 연구직원을 흡수한 현대전자 연구소는 지난해 모기업의 유동성 위기가 표면화하면서 직원들의 이탈속도가 가속화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반도체 설계 등 핵심분야에는 10년 이상된 책임급 연구원이 극히 부족한 상태"라며 "핵심인력이 동료 연구원과 함께 빠져나가는 경우에는 연구역량에 심각한 타격이 온다"고 말했다.
반도체분야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뿐 아니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지에서도 신규시장이 형성되면서 숙련된 연구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
▽두뇌유출은 기술경쟁의 낙오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도 기술인력의 또 다른 유출시장. 한 조사에 따르면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정보기술 인력을 구하겠다는 구인요청의 46%가 외국계기업이 낸 것이었다.
헤드헌팅 업체인 ANS 정해탁(35)대표는 "해외진출을 노리는 대기업 등의 고급인력들이 언어장벽, 이주비 등의 문제를 고려하다 국내 현지 법인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5년까지 5,000억원을 투자해 20만명의 정보통신 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연구와 기술개발의 안전한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또다시 애써 키운 전문인력을 외국 경쟁기업에 뺏길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장영배(張英培ㆍ44) 정책국장은 "두뇌유출을 계속 방치한다면 기초 연구기관의 부실화는 물론 세계적인 기술경쟁에서도 낙오할 것"이라며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김경철기자
kckim@hk.co.kr
김정곤기자
kimjk@hk.co.kr
■최형섭 前과기장관 인터뷰 "두뇌유출 이렇게 막아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해외 과학자 유치에 적극 앞장섰던 최형섭(崔亨燮ㆍ80)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최근의 해외 두뇌유출 현상을 크게 우려하며 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고급 인력들이 왜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연구개발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과학기술 정책은 사람이 중심에 없습니다. 기초과학연구에 경쟁논리만 들이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연구자들은 돈 때문에만 외국에 나가는 게 아닙니다. 연구환경만 갖춰져 있으면 고국에서 들어와 편안하게 연구하지 구태여 왜 외국에 나가 머슴살이를 하겠습니까"
-어떤 대책을 세워야 두뇌유출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연구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 생활의 안정성, 사회적 인정(social recognition)을 확보해 줘야 합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만들 때는 KIST 육성법을 만들어 연구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했습니다.
60년대 당시 미국에서 고급연구원들의 월급이 2,000달러였고 우리가 줄 수 있는 월급은 5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월급 500달러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결국 돈만으로는 도저히 모시고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연구원들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원 자녀들은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을 시켜주었고, 의료와 주택 문제도 해결해주었습니다"
요즘도 과학기술 인력을 육성하자는 구호는 많지만 마음처럼 잘 안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구원들이 '국가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 통치자의 관심이 무척 중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KIST에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연구원들과 다과회를 가졌습니다. 내가 '그만 오시라'고 만류할 정도였습니다.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프로젝트를 따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정부가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능력 있는 연구자가 100원을 달라고 하면 150원을 주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미국 미네소타대 공학박사인 최 전 장관은 KIST 초대 소장(66~71년)과 과학기술처 장관(71~78년)을 역임하면서 대덕연구단지 조성, 국책 과학연구소 설립 등을 주도, 한국 과학기술계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특히 8년간이나 과기처 장관을 재임, 건국이후 최장수 장관이란 영예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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