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치과의사 모녀살해 사건'의 이도행(李都行ㆍ39) 피고인에게 다시 무죄가 선고됐다.법원의 '증거주의' 원칙을 재확인한 이번 판결에 대해 검찰은 즉각 재상고 의사를 밝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주목된다.
서울고법 형사5부(이종찬ㆍ李鍾贊 부장판사)는 17일 이 피고인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유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유죄를 입증할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 내세운 범행동기 등을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고, 제3자의 범행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시강(시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굳는 정도)과 시반(시체에서 나타나는 반점) 역시 이번사건이 피고인의 출근 시간인 오전 7시 이전에 발생했다는 증거로 단정하기 어렵고, 검찰이 주장하는 '지연화재'도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은 범죄 증명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이 피고인은 1995년 6월12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M아파트 집에서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시체를 욕조에 옮겨놓은 뒤 이를 숨기기 위해 아파트에 불을 지른 혐의로 같은해 9월 구속기소됐다.
이후 이 사건은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98년 항소심에서 무죄, 같은해 상고심에서는 유죄취지로 파기환송되는 반전이 거듭됐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이도행씨 무죄'선고 배경 / "정황증거로는 불충분" 고심끝 결론
서울고법은 17일 이도행(李都行)씨에게 또다시 무죄를 선고한 것과 관련, 상당한 고충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검찰이 제시한 정황 증거로는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황 증거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지 못하게 한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즉 의심은 가나, 엄격한 범죄사실 증명이 없는 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
우선 재판부는 범행동기가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아내의 불륜도 이미 2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다, 결혼 초기의 불화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는 주변 증언도 고려됐다.
검찰이 유죄 입증의 유력한 정황으로 든 시강과 시반 문제도 증거로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사건 당일 이씨가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7시.
검찰은 사체의 강직도와 시반을 고려, 범행시간을 새벽 4시~4시30분이라고 추정해 이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재판부는 "시강과 시반의 발현시간은 법의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다르다"는 변호인측 소견을 받아들였다.
이씨가 수사혼선을 위해 이른바 '지연화재'를 냈다는 주장도 배척됐다.
재판부는 변호인측이 사건 현장을 재연해 '지연화재는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린 실험 결과를 일부 증거로 채택한 반면, 화재발생 시간을 이씨의 출근 전으로 추정한 검찰측 화재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부정확한 진술에 근거한 것"이라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98년 11월 "간접증거들이라도 종합적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며 유죄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으나, 이번에도 대법원의 취지에 반한 무죄가 선고된 것은 이례적. 치열하게 공방을 벌여온 법의학 및 화재 실험 등에 관한 심리가 무죄심증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재판부 일문일답
지난 2년3개월간 파기환송심을 이끌어온 서울고법 형사5부 이종찬(李鍾贊) 부장판사는 17일 선고 뒤 "수사기관이 보다 과학적인 수사와 충실한 증거수집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를 뒤집었는데.
"대법원의 환송 취지가 유죄라고 본 것은 아니다. 일부 증거에 대한 심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내 법의자학자들의 일부 증언을 믿기 어렵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사체 발견시 현장에서 검증이 이뤄지지 않는다. 자료로만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재판부 내에 의견차는 없었나.
"사물은 보는 시각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유ㆍ무죄를 단정하지 않고 판사들이 절차탁마의 심정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결론을 다듬어 나갔다."
-선고 후 감회는.
"사안이 중한 범죄일수록 직접증거가 없는 사건이 많은데 모두 무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확신이 안 서는 증거로 중형을 선고할 수는 없었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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