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 홀아비 아닌 홀아비들이 늘어난다. 돈을 버는 가장만 한국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외국에 나간, 이산가족이다. 전쟁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예전의 이산가족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신(新)이산가족'이다.#1
서울에서 오퍼상을 경영하는 A씨(41). 그는 매일 저녁 6시 e-메일을 체크한다. 업무상 사무실과 집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을 확인하는 편이지만, 이 시간은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 이때가 뉴질랜드는 오후 10시.
뉴질랜드에 있는 아내와 딸이 하루 생활을 A씨에게 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메일을 확인하고 채팅사이트를 이용해 대화도 나눈다.
할머니와 고모가 사는 캐나다를 방학마다 다녀온 초등학생 딸이 "캐나다 학교 선생님들은 한국의 선생님보다 훨씬 친절하다"며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어했다.
1999년 가을 캐나다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외국 생활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리다 싶어서 아내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모녀는 1년 전 뉴질랜드로 옮겼고, 아내도 공부를 시작했다. A씨 가족은 출장 또는 방학 등을 이용해 서너 달에 한번쯤 만난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알아서 자기관리를 하게 된다." 혼자 남은 A씨는 라면은 입에 안 댄다. 결혼 14년 만에 처음으로 운동도 시작했다. 매일 e-메일로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는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 5년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딸아이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해 섭섭하다"고 말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견디고 있다.
#2
중견업체 부장 B씨(43)는 요즘 퇴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집을 팔아 그 돈을 캐나다로 보냈다.
두 아이와 함께 4년 전부터 캐나다에 살고 있는 아내가 구멍가게라도 시작하면 한국을 떠날 생각이다. B씨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것은 모험이지만, 혼자 사는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 세 끼 모두 밖에서 해결했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사무실을 지키기가 일쑤였고 술자리도 자주 만들었다. 텅 빈 집에 들어가기가 뭣하고 외로움을 달랠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휴일이면 등산이다, 운동이다 하면서 총각 사원을 불러내는 민폐를 끼치곤 했다.
"마흔이 돼서야 익힌 인터넷으로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 받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지만 전화비도 만만치 않았다.
또 아내가 '고독'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도 마음 한 구석에서 떨칠 수 없었다. 가족이 6개월 정도 한국에 들어와 있기도 했지만, 두 자녀가 이곳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길 원했다. 가족을 한국으로 불러들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이다.
모두 40대 초반의 가장들이다. 이들이 '홀아비'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다 나은 여건이 갖춰진 곳에서 내 아이가 교육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기업체 간부인 C씨(47)는 휴직하고 한 달간 캐나다를 다녀왔다. 아내와 두 자녀의 캐나다 정착을 돕기 위해서였다. '왕따'를 당한 중학생 아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나은 환경서 교육시키려 해외 조기유학
"희생 기꺼이"… '홀아비' 마다않는 자식사랑
신이산가족이 늘어나는 것은 자녀가 국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세계화 흐름에 맞춰 국제적 감각을 일찍이 키워주기 위해서, 보다 훌륭한 교육 여건을 찾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또 가족을 동반해 해외주재 상사원으로 일하다 가장만 귀국하고 가족은 현지에 남는 경우도 많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1999년말 현재 조기유학생은 1만 1,237명. 초등학생이 5,695명, 중학생이 3,6605명, 고등학생이 1,937명으로 어린 초등학생들이 가장 많다.
가족상담교육연구소 박정희 책임연구원은 "결혼 초 부부중심적이고 현재지향적인 가정을 꿈꾸다가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녀중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가정으로 변한다"며 "스스로 입시경쟁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자녀만큼은 그런 피해자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이산'을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 엄청난 사교육비, 왕따 등 교실붕괴 현상은 이산을 부추긴다. 특히 사교육비 등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어차피 한국에서 이런 저런 과외를 시키느라 드는 비용을 계산하면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게 별반 차이가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민이나 조기유학이 많은 캐나다나 호주, 뉴질랜드는 미국에 비해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사실도 한 요인이다. A씨는 생활비와 아내의 학비를 포함해 한달 평균 250만~300만원을 부친다.
딸이 한국에 있을 때 피아노레슨 등 과외비로 들어간 게 약 50만원. A씨는 "사교육비가 없기 때문에 따져 보면 조금만 더 들 뿐"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아내가 공부를 시작하면서 부부간의 권태기를 극복하는 부차적인 소득까지 얻었다. B씨도 매달 약 200만원을 캐나다로 보낸다.
그러나 홀로 남은 가장은 외롭다. 같이 나가서 살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사회의 중견으로 자리잡은 40대 가장들이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모험을 걸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외국에서의 재취업도 쉽지 않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야 하는 외국생활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 '돈 버는 기계'나 다름없어도 자녀교육이라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위해 이들은 '한시적 희생'을 선택한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몸은 떨어졌어도 "인터넷통해 한가족"
P씨는 아내와 함께 고등학생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면서 다이얼패드 사용법부터 익혔다. 인터넷을 통해 미국으로 값싸게 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N씨도 뉴질랜드로 가는 모녀의 짐 속에 노트북을 제일 먼저 집어넣었다. N씨 가족은 뉴질랜드와 한국에서 각각 PC카메라를 갖추고서 화상채팅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는 듯 아버지는 자녀의 학교생활을, 아내는 남편이 제때 식사를 하는지를 챙길 수 있다.
한 지붕 아래 서로 몸을 부비면서 확인하는 가족애는 일년에 한두번 만날까말까한 신이산가족에겐 실체가 없다.
대신 가족간의 정서적 친밀감을 이어주는 고리로 인터넷이 자리잡았다. N씨는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염려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수시로 확인한다"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와 자녀로서, 부부로서의 가족관계는 이어진다.
가정은 교육, 휴식, 정서, 오락, 종교, 성과 애정, 생산과 소비 등 다양한 기능이 혼합된 공동체이다. 가족상담교육연구소 박정희 책임연구원은 "이중 어떠한 역할에 중점을 두는가는 가족의 선택이자 합의사항일 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절대적 기준은 없다"며 "신이산가족은 교육에 포커스를 맞춘 가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교육 이외의 기능을 소홀히 함으로써 파생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가정경영연구소 손정숙 연구원은 교육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겪는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의 역할 모델이 없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단지 '돈 보내주는 기계'쯤으로 여길 우려, 특히 혼자 남은 가장들이 느낄 신체적ㆍ정서적 공허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수원대 아동가족학과 최규련 교수는 "결혼생활을 신체적 의사소통으로만 보면 한눈 팔기 쉬운 상황이지만 자녀교육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간의 결속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재결합 하게 되면 새로운 적응필요
7년 만에 한 집에서 살게 된 부부가 서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옷과 구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놓는다. 저녁에 들어오는 시간도 제멋대로이고 그나마 술에 취해 들어오는 때가 많다. 아랫배도 불룩해져서 보기 싫다." (아내)
"간섭이 심하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큰 며느리 노릇 좀 해보라는데 싫다 한다."(남편)
미국유학을 떠나면서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딸도 데리고 갔던 J씨.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 이제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살게 됐는데 이 부부는 걸핏하면 싸운다. J씨 부부는 이혼까지 염두에 두고 상담소를 찾았다. 떨어져 살았어도 그 동안 이혼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흩어져 사는 데 익숙해져 버린 신이산가족들은 뭉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산 이전의 과거 모습 그대로 회복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수원대 아동가족학과 최규련 교수는 서로 가정환경이 다르게 성장한 남녀가 가정을 꾸렸을 때처럼 '신(新) 신혼기 적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각각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던 이산가족은 갑작스런 구속에 당황하기 일쑤다. 남편은 혼자 있을 때는 제약없이 맘껏 즐기던 술자리며 자유로운 사회생활이 그립고, 집에 들어와서도 가족에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외국에 나가있다 돌아온 아내는 시집 식구들에게 못다한 며느리 노릇을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를 갖는다.
최 교수는 "과거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특히 부부 간에는 상대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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