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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내가 복권을 긁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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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내가 복권을 긁는 이유

입력
2001.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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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벽에 다닥다닥 붙어서 복권을 긁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불경기여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도 하고 사행심 조장이 지나치다고도 한다.뉴스나 기사에는 한 달 수입의 10%를 복권을 사는 데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고 경계를 고한다. 하지만 나는 복권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복권은 정선의 카지노와 다르고 고스톱하고도 다르다. 왜 체면도 잊고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벅벅 긁을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고 하지만 말뿐이고 실제 인간은 법 앞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

돈 많고 '빽' 좋은 사람은 감옥에 잘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게 되더라도 곧 나온다. 게다가 외모로 인한 불평등은 정말 억울하다.

정우성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데 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_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_많은 돈을 벌고 스타가 되었다.

심은하도 인간성이 어떤지 모르지만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였다. 그런데 정우성이나 심은하가 노력해서 잘 생기고 예뻐진 것인가?

아니다. 타고 난 것이다. 이런 불평등이 어디에 있나! 부모는 어떠한가? 어떤 이는 부자고 교양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가난하고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부모가 인생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불평등 해소는 참으로 어렵다.

불평등서 벗어나고자

살다 보면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거의 누구나 알게 된다. 현실적인 난관에도 불구하고 평등해지고 싶다는 욕구는 잠재워지지 않는다.

우리 같은 서민이 어떻게 평등을 맛볼 수 있을까? 나는 복권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복권에서 당첨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집안 배경이나 생김새와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운이다. 당첨이 오직 운에 달려 있기 때문에 복권을 긁는 그 순간만은 세상의 온갖 불평등에서 벗어나 평등을 맛보게 된다. 아! 이 순간.

독서삼매가 아니라 복권삼매에 빠진 그 순간,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 게다가 정말 운좋게 당첨까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복권이 카지노와 다른 점은 재산탕진이 없다는 것이다. 복권으로 재산탕진한 사람이 있는가? 복권은 일확천금이 주목적이 아니라 평등의 삼매경에 빠지는 것이 실제 목표이므로_물론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_멀쩡한 정신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재산탕진과 같은 해악적 요소는 없다. 그리고 복권이 고스톱과 다른 이유는 기술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고스톱은 매우 복잡한 게임이다.

머리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야 하고 판돈까지 풍부해야 이길 수 있다. 고스톱 잘 치는 책까지 나올 정도다.

즉 기술이 있어야 고스톱에서 희열을 맛볼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까지 불평등이 개입하다니! 더욱이 요즘에는 이해관계에 따라 져주는 고스톱도 쳐야 한다.

평등사회 되기까지는

복권이 운에 의한 승부이므로 평등을 맛볼 수 있다면 고스톱도 운에 의한 승부로 만들 수는 없을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다.

그것은 화투를 마구잡이가 되도록 섞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통계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카드는 일곱 번이나 여덟 번 섞고 나서야 갑자기 마구잡이가 된다고 한다.

즉 두세 번 섞어서는 마구잡이가 아니므로 운에 의해 승부가 날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마구잡이가 아닌 카드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고스톱에서 운에 승부를 걸려면 다소 욕을 먹더라도 화투를 많이 섞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복권의 판매가 부진하고 고스톱의 인기가 시들해진다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평등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복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나도 오늘은 지하철 담벼락에 붙어서 복권을 긁어야겠다.

탁석산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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